까마귀떼의 휴식처가 도심이다.
화명동의 하늘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밤을 맞이한다. 가로등이 채 켜지기도 전, 도심의 전선 위로 내려앉는 수천 개의 검은 그림자 때문이다.
오후 4시 30분. 식료품점의 마감 할인이 시작되는 이 시간은 초보 알뜰 주부가 된 나에게 가장 분주한 때다. 세 달 전까지 남편이 전담하던 살림을 내가 이어받으면서, 단돈 몇백 원이라도 아껴보려는 마음으로 카트형 장바구니를 끌고 번화가로 나선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곧 길바닥의 세일 전단지가 아닌, 하늘의 생경한 풍경에 고정되고 만다.
꽹과리와 레이저, 그 서글픈 불협화음
신한빌딩 앞 전선은 평소보다 무거운 중력으로 내려앉아 있다. 낮 동안 주변 산과 들로 흩어졌던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도심의 전선 위로 모여드는 시간. 수만 개의 날갯짓 소리와 기괴한 울음소리가 빌딩 숲 사이로 울려 퍼지는 모습은, 대자연과 현대 문명이 초현실적으로 충돌하는 거대한 설치 미술 같다.
하지만 이 이색적인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그리 길지 않다. 하늘에서 예고 없이 투하되는 ‘배설물 테러’ 때문이다. 도심의 불빛을 찾아온 이 불청객들은 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참다못한 민원이 빗발치고, 급기야 화명 1·2동과 북구청 공무원들까지 이 ‘까마귀와의 전쟁’에 동원되었다.
현장의 공무원들 손에는 원시적인 꽹과리와 현대적인 레이저 포인터가 들려 있다. 소음과 빛의 결합으로 새들을 쫓아보려 하지만, 영리한 까마귀들은 잠시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이내 비웃듯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그때, 한 공무원의 손등 위로 툭, 끈적한 액체가 떨어진다. 불쾌함에 얼굴을 찌푸리는 그에게 동료가 물티슈를 건네는 고단한 풍경 속에, 사랑하는 내 딸이 섞여 있었다.
딸의 어깨에 남은 검은 잔상
딸은 허공을 향해 연신 레이저 포인터를 쏘아 올리고 있었다. 찰나의 빛에 놀라 까마귀들이 잠시 흩어지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무의미한 반복. 그 사투를 멈추지 못하는 딸의 바쁜 손놀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 왔다. 어둠 속을 가르는 가느다란 초록빛 줄기는 마치 거대한 어둠을 밀어내려는 딸의 절박한 호소처럼 보였다. 저 작은 빛으로 저들을 다 막아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딸은 저녁 내내 팔이 아리도록 빛을 휘둘러야 할 것이다.
마침내 나를 발견한 딸이 "엄마!" 하고 환하게 웃으며 불렀다. 곁에 있던 동료들과도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딸의 얼굴엔 어느새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몇 마디 안부를 건네기도 전에 딸은 내 장바구니를 살피며 다급하게 나를 밀어냈다.
"엄마, 여기 서 있으면 새똥 맞아요! 위험하니까 얼른 쪽길로 해서 올라가세요. 얼른요!"
등 떠밀리듯 돌아서는 길, 딸의 제복 어깨 쪽을 스친 작은 얼룩이 못내 눈에 밟혔다. 닦아주려 손을 뻗기도 전에 딸은 다시 허공을 향해 레이저를 쏘아 올렸다. 나는 딸의 말대로 까마귀가 덜 날아다니는 쪽길을 선택해 발걸음을 옮겼다. 불과 몇 걸음 차이로 정적이 흐르는 우회로에 들어섰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그 소란스러운 검은 무리 아래 서 있는 딸의 등에 머물러 있었다.
공존이라는 이름의 고단한 청구서
어쩌면 전선 위에서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잠자리를 찾는 까마귀들도 실은 우리만큼이나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지 모른다. 자신들의 숲을 잃고 차가운 전선을 택한 새들과, 그들을 밀어내야만 도심의 일상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의 서글픈 대치. 이 피할 수 없는 조우가 가져온 대가는 내 딸과 같은 누군가의 헌신적인 노동으로 치러지고 있었다.
장바구니 속 식재료는 몇백 원 싸게 샀지만, 그 대가로 내 아이는 밤이 깊도록 허공에 헛된 팔질을 해대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평온한 일상이 실은 누군가의 고된 하루 위에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음을, 나는 오늘 까마귀 떼 아래서 배운다.
집으로 돌아와 장바구니를 정리하면서도 자꾸만 창밖 어두운 하늘을 본다. 내일은 딸의 제복 어깨 위로 오물 대신 따스한 햇살만 내려앉기를, 그 가벼워진 어깨로 퇴근하는 딸을 활짝 웃으며 맞이할 수 있기를 빌어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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