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 오조지질트레일을 걷다.

길 위에서 등불을 만나다:

by 성희

성산. 오조 지질트레일

2022년 사진

​내 마음속에는 늘 지워지지 않는 풍경 하나다. 바다와 비슷한 높이로 나란히 이어져, 걷다 보면 마치 바닷속을 유영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던 그 길. 파도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바닷물이 차올라 진득해진 구간을 아슬아슬하게 지나며, 새까만 현무암 바위 사이를 통과하던 길이다. 바다와 한 몸이 되어 호흡하는 그 길을 나는 늘 그리워했고, 가보지 못한 몇 년의 시간 동안 꿈속에서조차 그 길을 걷곤 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여정의 시작은 고성리 유채밭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노란 물결을 마주하는 순간, 수만 개의 노란 등불을 켜둔 것 같은 찬란함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잿빛 바람 속에서도 제 빛깔을 잃지 않은 유채꽃들은 길을 떠나는 여행객에게 환한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특히 유채밭 쪽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낮은 봉우리가 바다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식산봉 안내판에서 보았던, 밤이면 하늘의 달과 바다에 비친 달이 나란히 뜬다는 **'쌍월(雙月)'**의 의미가 비로소 가슴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꽃물 든 미소를 머금고 노란 옷을 맞춰 입은 채 꽃밭 사이에 서니, 이 길의 끝에 기다리고 있을 옛 풍경들에 대한 기대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바다가 허락한 비밀스러운 통로

​유채꽃의 배웅을 받으며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로 들어섰다. 붉은 글씨가 선명한 배 모양의 **'달빛수산 전망대'**를 지나자, 제주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원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물 때 들어온 고기들이 썰물 때 나가지 못하도록 돌을 쌓아 만든 이 옛 양어장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삶을 일궈온 제주 사람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지금은 잠시 쉬고 있는 양식장의 잔잔한 물결을 지나 은빛 억새가 양옆으로 빽빽한 길에 들어서니, 바다가 나에게만 허락한 비밀스러운 통로를 걷는 듯 기분이 참 좋았다.

튜물러스
제주밭담

​이어지는 길은 **튜물러스(Tumulus)**와 제주 밭담 구역으로 연결되었다. 화산 폭발 당시 용암의 압력으로 지표면이 구릉 형태로 치솟은 이 지형은 제주의 태곳적 신비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그 곁을 지키는 밭담은 또 어떠한가. 아귀를 맞추어 정교하게 쌓아 올린 돌담은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막는 대신, 돌 사이사이 뚫린 구멍으로 바람을 달래며 그 강도를 약화시킨다. 시멘트로 틈을 메워버린 매끈한 담보다, 투박한 구멍 사이로 숨길을 터준 이 밭담이 훨씬 아름답고 믿음직스러웠다.

​시간이 흐르며 변해버린 것들에 대하여

튜물러스 지형을 지나자 드디어 오조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것은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예쁜 동백나무였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집집마다 정성껏 쌓아 올린 돌담과 주인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정원들이 눈에 들어와 마음이 포근해졌다.


여탕
남탕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용천수인 족 지물에 닿았다. 마을 아주머니는 예전에 이곳에서 남탕과 여탕을 나눠 목욕도 하고 빨래도 했다며 정겨운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생활의 중심이 되지 못한 채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는 용천수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못내 안타까웠다.


​족지물을 지나 철새 도래지의 목재 데크를 건너자 **식산봉(食山峰)**에 닿았다. 외적의 침입 때 오름 전체를 볏짚으로 덮어 군량미처럼 위장했다는 지혜로운 유래를 되새기며 길을 이어갔다. 하지만 식산봉을 지나며 마주한 길은 내가 기억하던 그 길이 아니었다.

​지금 이 길은 너무나 걷기 좋게 정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안전을 위해 길의 높이를 높였으리라. 덕분에 발걸음은 편해졌지만, 바다와 눈높이를 맞추며 호흡하던 옛 길의 야생적인 매력은 다시 느낄 수 없었다. 정비된 길 위에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그 시절의 감각을 그리워하며 묘한 상실감에 젖어들었다.

​성산포 바다에 사는 '흥에 취한 물귀신'

​전망대 데크에 서니 광활한 내수면이 한눈에 들어왔다. 매일 오후 이 길을 걷던 남편은 썰물로 바닥을 훤히 드러낸 내수면을 처음 본다며 아이처럼 신기해한다. 성산갑문의 좁은 틈 사이로 거대한 바다의 들숨과 날숨이 오가며 수위를 조절하는 자연의 섭리가 새삼 경이롭게 다가왔다.

​길은 올레 1코스로 이어진다. 푸른 무밭 너머로 보이는 성산일출봉은 다른 각도에서 보니 마치 영암의 월출봉을 보는 듯 신비로웠다. 이생진 시인이 자주 찾았다던 카페 **‘코지’**를 지날 때는 세월의 흐름 속에 폐허처럼 변해가는 건물이 아쉬웠지만, 여전히 손님을 기다리는 앞마당의 의자들이 묘한 향수를 자극했다.

​드디어 도착한 ‘이생진 시비 거리’. 시비에 새겨진 글귀를 따라 걷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성산포 바다에는 **'흥에 취한 물귀신'**이 사는 게 분명해!"

​이곳 물귀신은 사람을 잡아가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이의 마음을 붙잡아 시 한 구절에 머물게 하고 풍경에 넋을 잃게 만드나 보다. 나도 모르게 성산포의 푸른 물귀신에게 마음 한 조각을 뺏기고 말았다.

​평화의 풍경 뒤에 숨겨진 서늘한 기억

​여정의 끝자락, 수마포 해안에서 일출봉을 배경으로 남편과 나란히 돌담에 앉아 사진을 남겼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부셨지만, 고개를 돌리자 절벽 아래 검은 입을 벌린 **'일제 동굴진지'**들이 보였다. 해상 자살 공격을 위해 구축된 아픈 역사의 흔적. 이 아름다운 풍경과 서늘한 역사가 한 장면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길은 지질트레일의 막바지, **‘터진목’**에 닿았다. 제주 4·3 사건 당시 수백 명의 주민이 집단 학살당한 통한의 현장이다.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위령탑 앞에 서서 그날의 비극을 증언하는 영령들의 넋을 기리며 깊은 숙연함에 잠겼다.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그 안에 새겨진 상처는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다시 시작될 다음의 여정을 기약하며

​돌아오는 길에는 반가운 이름들을 만났다. 예전 구독자님이 추천해 주셨던 **‘커큐민 흑돼지’**와 점심시간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던 **‘맛나 식당’**이다. 오후 2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붐비는 식당가를 지나며, 우리는 다음 달에 꼭 다시 와서 이곳의 맛을 보기로 약속했다. 여행은 이렇듯 '다음에 다시 올 이유'를 남겨두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광치기 주차장을 지나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오늘 총 10km를 걸었다. 3시간 20분간의 여정. 꽤 먼 길이었지만 체력이 허락해 준 덕분에 마음만은 가뿐했다.

​저녁이 되니 차체가 흔들릴 정도의 강풍이 불어온다. 하지만 오늘 하루, 유채꽃의 설렘부터 아픈 역사, 그리고 우리만의 다정한 추억까지 함께 걸어온 이 길은 강풍마저도 잊지 못할 제주의 깊은 울림으로 남겨주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시간은 흐르지만, 변해버린 풍경 뒤에도 생명과 이야기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오늘 마주한 이 변화들은 이제 내 마음속에 새로운 형태의 등불이 되어 오래도록 머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