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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돌향 Feb 15. 2024

노인이 휴대폰 스피커를 크게 트는 까닭

블루투스 이어폰 사용이 익숙지 않은 노인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나 동네 언덕산에서 산책을 할 때 휴대폰 스피커를 크게 틀어 놓고 음악이나 유튜브 방송을 듣는 노인들을 종종 보게 된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듯한 그러한 행동은 아직 노년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인 특유의 아집 또는 둔감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은 같다.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숲길을 걷는데 마주 오는 노인의 휴대폰에서 유튜브 방송임이 분명한 사나운 말소리가 크게 들려온다면 유쾌함과는 거리가 먼 복잡한 감정이 든다. 노인의 몰배려에 눈살이 찌푸려지면서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그와 같은 태도가 노인에게 가져 올 고독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울러 노인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안 하고, 간단히 '노인은 왜 저러나.'하고 끌탕을 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죄책감까지 느껴진다. 그 순간 노인을 대하는 나의 의식과 태도는 근원적으로 인종주의를 닮았기 때문이다.


'이어폰을 쓰시지...'


노인이 휴대폰 스피커로 소리를 듣는 것은 이어폰을 쓸 때 자신이 겪을 작은 불편을 꺼려하여 다수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을 아랑곳하지 않게 된 이기적인 행동으로만 여겼다.


며칠 전 장인어른이 오셔서 하루 머물다 가셨다. 

장인어른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휴대폰을 매만지고 계시다가 갑자기 생각난듯 말씀하셨다.


"서 서방, 남은 이어폰 하나 있나?"


장인어른이 휴대폰 소리를 크게 해 놓고 소란스럽게 방송을 듣는다고 푸념하시던 장모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장모님의 잔소리 때문에 이어폰을 쓰시려는 건가. 아무튼 이어폰을 쓰시면 장모님에게도 불편할 일이 없고, 장인어른도 마음 편히 방송을 들으실 수 있으실 테니 다행이다 싶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사용하면서 더 이상 쓰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 둔 유선 이어폰을 찾으려는데 


"여기, 이 구멍에 맞는 이어폰이 필요한데"


장인어른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것은 이어폰 단자가 아니라 휴대폰 마이크와 연결된 구멍이었다. 그렇지. 다들 블루투스 이어폰을 쓰기 때문에 요즘 나오는 휴대폰은 이어폰 단자가 없었지. 


"아버지, 이건 이어폰 꽂는 데가 아니에요. 요즘 휴대폰엔 이어폰 꽂는 데가 없어요."


마침 집에 남는 블루투스 이어폰이 있어 우선 그걸 쓰시게 해 드렸다. 사용법을 알려 드리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들었다. 다행히 장인어른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익히시는 게 빠르신 분이어서 잠깐 설명해 드리자 이내 사용법을 이해하셨다. 


장인어른은 30년 넘게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셨던 분이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 같은 서비스가 일반화되기 전인 2000년대 초,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으신 나이에도 독학으로 HTML과 코딩을 독학으로 익혀서 개인 누리집을 운영하실 만큼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높고, 배움에 적극적이신 분이다. 그런데 장인어른 같은 분도 유선 이어폰 단자가 없는 휴대폰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해 써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셨던 것이다. 


그 순간 지하철과 숲길에서 만난, 휴대폰 스피커를 크게 틀어 놓고 음악이나 방송을 듣던 노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분들이 공공장소에서 휴대폰 스피커를 크게 틀어 놓았던 것은 단지 이어폰을 쓰고 싶어도 휴대폰에 이어폰 꽂는 구멍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블루투스 이어폰이라는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 노년에 이르지 않은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의 틀거지를 바탕으로 하여 섣불리 노년의 행동을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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