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대로 일이 술술 풀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인생은 생각한 만큼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처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의 발목을 잡는다. 그 뜻하지 않은 상황에 인생은 나의 대처 능력을 시험한다. 화를 낼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더 좋은 방법은 뭘까?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아, 내가 좋은 선택을 했구나. 아, 내가 그때 이런 선택을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며 후회를 하거나 만족을 한다.
뜻하지 않은 상황은 언제든 찾아온다. 아이들과 무수한 수업을 하면서 계획한 대로 수업이 이뤄지지 않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전은 언제나 새롭고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8,9세 아이들 둘을 데리고 20킬로가 넘는 캐리어 가방을 끌고 지하철 엘리베이터 타는 곳으로 갔는데 하필이면 1년 365일 중에 그날이다. 공사 중이다. 머리가 하얘졌다. 방법은 있다. 맞은편 엘리베이터 타는 곳으로 가면 된다. 희망을 가지고 그 무거운 짐과 아이들 둘 데리고 맞은편 엘리베이터로 갔지만 작업하는 아저씨가 또 보였다.
'나보고 어떻게 이 무거운 짐을 계단으로 끌고 가라 말인가!'
어떻게 할까? 다음 역까지 걸어서 엘리베이터 있는 곳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택시를 타고 다음 역까지 갈까? 머리에서 오만 가지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딸이 "아빠, 그냥 걸어 내려 가자. 다리 아파"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끝내 보기 싫은 계단을 봤다. 계단이 끝이 없었다. 지하 3층 정도 되는 깊이의 계단이 너무나 얄미워 보였다. 주위를 보니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는 할머니가 보였다. 평소엔 소중하지 않게 느껴지다가 갑자기 못 쓰게 되니 엘리베이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아빠, 내가 들어볼게" 하며 딸아이가 20킬로가 넘는 초대형 캐리어를 혼자서 낑낑대며 들었다. 들어질 리가 없었다. "와! 진짜 무겁네" 하며 딸이 기겁을 했다. 일단 한 계단씩 바퀴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캐리어가 너무 무거운지 중심이 맞지 않아 캐리어가 쓰러질 것 같았다. 바퀴 네 개가 갑자기 또 너무 작고 약하고 불쌍해 보였다. 바퀴가 고장 나면 이 무건운 짐을 공항까지 들고 가야 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이렇게 내려가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캐리어를 눈 깜고 한 번 딱 들어봤다. 허리가 찌릿했다. 중요한 건 들어졌다는 거다. 허리 디스크에 무릎 통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캐리어를 들고 3층 깊이의 계단을 들고 내려가는 건 정말이지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의 일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냐 공항은 가야 하는 법. 캐리어를 들고 한걸음 한걸음 용을 쓰고 내려갔다. 들고 가다 너무 힘들어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딸에게 외쳤다. "딸 좀 도와죠." 그 말에 딸이 캐리어를 들어줬다. 그 무거웠던 캐리어가 순간 깃털이 달린 것처럼 가벼워졌다. 딸 키운 보람을 제대로 느꼈다.
무사히 계단을 내려왔으면 좋아야 할 감정이 엘리베이터 공사하고 있던 아저씨를 보자 갑자기 화로 바뀌었다.
'엘리베이터 공사를 하나씩 하지. 왜 양쪽에서 같이 해서 이렇게 힘들게 하노'
아직도 인생 내공이 덜 쌓였다. 내 안의 불평불만이 그렇게 또 많은지 이런 상황에 놓이고 나서야 나를 또 알아가게 된다.
예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1년 만에 여행 가는 기쁜 날에 엘리베이터 공사를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하 3층 깊이의 계단을 20킬로가 넘는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내려가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뜻밖의 상황에 그 짧은 순간에 최선을 다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아들과 딸이 캐리어를 들어줘서 생각지도 못하게 편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는 거다.
예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란 걸 머릿속에 항상 생각하며 오늘의 하루를 배운다는 자세로 살아가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