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아들과 난 각각 노트북 속 재미난 프로그램에 푹 빠져 저녁을 놓쳤고, 아내와 딸은 처남집에 다녀오느라 저녁을 제시간에 못 챙겼다. 배가 고픈 우리 가족을 위해 나와 아내는 가스 불 위에 압력 밥솥을 올려놓고 집 앞 마트에 삼겹살을 사 오기로 했다.
"딸, 엄마 아빠 같이 마트에 가서 고기 좀 사 올게. 밥솥 픽픽픽 돌아가는 소리 나면 꺼요."
"네."
혹시나 딸이 노트북을 보느라 깜빡할까 봐 한 번 더 부탁을 한다.
"딸! 소리 나면 꼭 꺼야 해요."
"네."
아내랑 집 앞 마트에 가서 삼겹살도 사고, 아내가 먹고 싶은 맥주도 두 병 샀다. 저녁 여덟 시가 되었지만 밤공기가 텁텁했다. 대신 한 번씩 쌩하게 불어주는 여름 바람 덕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런데 쌩하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디서 풍겨오는 음식냄새였을까, 갑자기 가스불에 올려놓은 압력 밥솥이 생각났다.
'우리 딸이 열 살이라 심부름도 잘하고 엄마 아빠 말도 잘 듣고 하니, 가스 불 끄는 것도 잘하겠지. 밥솥에 소리까지 나니 걱정 없겠지.' 하며 스스로 위로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내도 나를 따라서 열심히 쫓아오기 시작했다.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조금씩 뛰듯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자마자, 밥 타는 냄새가 대번에 내 코를 찔렀고, 칙칙 칙칙 밥솥 돌아가는 소리가 집안에 요란하게 들렸다. 딸과 아들은 노트북 속 시끄러운 오락 프로그램에 푹 빠져 밥솥 돌아가는 소리는 배경 음악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딸, 아빠가 끄라고 했잖아!"라는 볼멘소리로 부엌으로 냅다 달려가 가스불을 얼른 껐다. 가스불은 꺼지고 칙칙칙 밥솥 소리가 줄어들었지만 내 맘 속 화는 점점 더 나기 시작했다. 딸에게 한 소리 퍼부으려고 하는 순간, 아내가 아주 편안한 목소리로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밥 좀 탔는 모양이네. 숭늉해 먹으면 되겠다."
"..."
아내 말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 나오려던 말이 바로 사그라들었다.
'딸, 아빠가 두 번이나 끄라고 했제. 조금만 늦었으면 밥 다 타고 불날 뻔했다 아니가. 어떻게 할라고 그랬노? 불도 안 끄고..."
딸이 내 속 화가 가득 난 말을 들었더라면 얼마나 속상해서 눈물을 잔뜩 흘렸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아내의 태연한 말이 나도 살리고 딸도 살리고 우리 가족 다 살렸음에 틀림없었다.
밥솥 칙칙칙 소리가 잠잠해지고, 내 맘도 잔잔해질 즈음에 밥솥을 열었다. 밥 밑바닥과 옆 부분이 살짝 누러스런 색을 띠고 있었다. 내가 밥을 확인하는 걸 딸도 봤는지 내 옆에 슬쩍 와서는 내가 들을 수 있게 이런다.
"집중해서..."
그래 그랬다. 딸은 한 번 책에 빠져 있을 때는 불러도 대답이 없다. 책 보다 더 좋아하는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 속에 푹 빠져서 마치 주인공이 된 듯 마냥 뛰고 웃고 달렸을 우리 딸. 밥 솥 픽픽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보면 조급한 내 마음이 가장 문제였다. 배고파서 밥 빨리 먹고 싶다는 그 조급함이 내 화를 키웠던 게다. 아이들이 신나는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땐, 가스 불에 아무것도 안 올려놓는 게 사실 맞는 거였다. 삼겹살을 사 오고 나서 밥을 올려놓아도 조금 늦게 밥을 먹을 뿐,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였다. 나의 조급함 때문에 괜히 딸에게 잔뜩 잔소리만 퍼부울 뻔했다.
그날 저녁 배가 너무 고파 우리 가족 모두 삼겹살을 폭풍 흡입했고, 아내는 정말이지 그 탄 밥으로 숭늉을 해서 다음 날 아침에 먹었다. "숭늉은 타야 제맛이지."라고 말하면서. 그나저나 집중력은 정말 무섭다. 밥도 태울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