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알게 된 이름_이성선

그가 없었다면

by 이수정

2003년 봄, 갓 고등학생이 된 나는 우연처럼 보이는 선택을 했다. 중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인문계 여고로 진학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나는 야자 비와 방학 보충비가 부담스러워 상업고로 진학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들과 나는 친구였고, 그중 한 친구가 내게 제안했다.

“수정아. ‘바람소리’라는 문학동아리가 있대. 같이 가보지 않을래?”

“그거 너희 학교 애들만 갈 수 있는 것 아니야? 나는 상고잖아.”

“아니야. 학교랑 상관없대. 상고든 속고든 속여고든 고등학생이기만 하면 된대. 우리 오빠도 그 동아리야. 같이 가자.”

어릴 때부터 도서관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던 나는 결국 따라나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일요일에 친구와 함께 가기로 했다.


동아리 모임 장소는 지하실이었다. 혹시 일진들의 집합 장소에 잘못 온 것은 아닐까, 마음 한편이 서늘했다. 첫 만남이었다. 얕보이고 싶지 않아 아끼던 캐러멜색 가죽 재킷과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가죽 테슬이 달린 검은 부츠컷 청바지, 그리고 속초에선 구하기 힘든 베레모까지 눌러썼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지하실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할 줄 알았던 지하실은 환했고, 모여있는 사람들은 다들 순하디순한 얼굴들이었다. 그중 가장 튀는 사람은 나였다.


스무 명 남짓하던 동기들은 하나둘씩 갖가지 이유를 대며 탈퇴했다. 끝까지 남은 사람은 고작 다섯 명뿐이었고, 나는 홍일점이 되었다. 매주 일요일의 모임과 방학마다 준비하던 시낭송회는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주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참석하며 그렇게 3년을 꽉 채워 활동했다. 바람소리는 어둡던 고등학생 시절의 몇 가닥 빛이었다.


나의 청소년기가 이성선 시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마흔이 되어서야 알았다. 속초에는 ‘물소리 시낭송회’라는 성인 대상의 시 낭송 모임이 있었다. 물소리에서 청소년들도 시와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59회부터 청소년 시 축제를 열었다. 그 결과 ‘영북 청소년 문학회 바람소리’가 탄생했다. 그래서 물소리는 바람소리의 부모 격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람소리는 제법 엄격한 취향을 가진 청소년들의 모임이었다. 특히 홍수처럼 쏟아지던 인터넷 소설은 쓰레기라며 깎아내렸다. 그 당시엔 실물로 만져지지 않는 기록보다 실물을 남겨야 한다며, 글을 남기기 위한 홈페이지조차 없었다. 카페 같은 곳에 글을 쓰지도 않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구글에 바람소리를 검색하면 한 줄이라도 남아 있을까 하고. 검색창에 ‘영북 청소년 문학회 바람소리’를 검색해 보았다. 다행히 열 개 정도의 검색 결과가 있었지만, 그중 문학과 관련된 것은 단 하나였다. 이것이 이성선 시인과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물소리 시낭송회는 설악 문우회 회원 네 명, 이성선·최명길·이상국·고형렬 시인으로 시작되었다. 이성선 시인과 최명길 시인은 물소리 시낭송회가 해체되는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결국 물소리 시낭송회가 없었다면 바람소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성선 시인의 시비가 고성군 토성면에 있다. 들뜬 마음으로 시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토성면에서도 안쪽으로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들어가면 성대리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탁 트인 설악산과 울산바위가 가까이 보이는 마을이다. 시비로 들어가는 입구의 팻말은 이성선 시비라고 적혀 있었다. 마을 초입의 정자 앞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 들어갔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담벼락에 이성선 시인의 시 ‘사랑하는 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이 시를 시작으로 ‘빈 산이 젖고 있다’, ‘노을 무덤’ 등 대표작들이 이어졌다. ‘미시령 노을’만 알고 있던 나는 천천히 시를 읽어 내려갔다. 자연을 우주처럼 바라본 그의 시는 아주 맑았다.


시비 앞에는 아주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위로 쭉쭉 뻗은 감나무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나무에 예쁜 무늬가 있는 것이 모과나무였다. 이토록 큰 모과나무는 처음이었다. 모과꽃이 피는 봄에 왔다면 얼마나 예뻤을지 상상해 보았다.


시비에는 미시령 노을이 새겨져 있었다. 얼룩이 져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글씨를 읽기 어려웠다. 조금만 더 관리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주변의 벤치에도 시인의 대표작인 ‘저녁밥’과 ‘새’가 음각으로 파여있었다. 바닥까지 보이는 글씨들은 지금은 누런 소여물 색이지만, 새싹이 올라오는 봄이 되면 싱그러운 초록색 글자로 바뀔 것이다.


시비를 뒤로하고,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인터넷을 검색했으나 시비의 정보만 있을 뿐, 생가의 정보는 찾기 어려웠다. 다만, 김차중 작가의 <책 한 권 들고 떠나는 여행> 속에 생가 사진이 있어 사진 속의 집을 한참 찾아 헤맸지만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동네 막국숫집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성선 시인의 생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사장님은 자기를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막국수 가게 바로 앞에 있었다.

“여기예요.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데 이성선 시인 가족은 아니에요. 집도 한번 리모델링해서 옛날 집 같지 않아요.”

집은 책 속의 사진과 매우 달랐다. 이러니 못 찾는 것이 당연했다. 어느 쪽이 맞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또한 작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시비에 다녀오니 이성선 시인이 창단한 물소리 시낭송회의 이름이 이해되었다. 왜 하필 물소리일까, 오래 궁금했다. 그의 시는 늘 자연을 노래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자란 이성선 시인은 자연을 사랑했다. 물소리라는 이름은, 자연을 사랑한 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덕에 나는 그 시간을 버텼다. 그가 없었다면 바람소리도 없었을 것이다. 내게 빛나는 학창 시절을 선물한 별 같은 사람이다.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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