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대가(代價)
아이가 기침감기에 걸린 것이 벌써 열흘째다. 동네 소아과에서 진료받았지만, 기침은 더 심해졌다. 기침 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폐렴으로 진행된 것이 아닐지 걱정되어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근처에 의료원에 방문한 것이 닷새 전이다. 다행히 폐렴은 아니었지만, 기관지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처방받은 약을 다 먹었지만, 기침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다가 기침 때문에 구역질하기도 했다.
낫지 않는 감기에 초조해진 나는 강릉에 있는 소아전문병원에 가기로 했다. 근방 병원에서 오진한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워 검사를 다시 해보고 싶었다. 매번 진료받는 선생님은 오후부터 진료였다. 진료는 2시부터였지만, 청음을 잘 듣기로 유명한 선생님이라 예전에 3시에 도착했다가 이미 접수가 마감되어 진료를 못 받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일부러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했다. 아직 오전 진료도 끝나지 않았다. 오후 접수를 위한 번호표를 받고 다시 1시 40분까지 기다려서 번호표 순서대로 접수했다. 그런데도 다섯 번째 순서였다.
순번이 돌아올 때까지 다시 기다렸다. 꼼꼼하게 봐주시는 선생님이라 평소에도 늦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늦다.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아이의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앞선 처방전을 느릿느릿 작성하고 있었고, 아이는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린 뒤에야 진료를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아이의 폐 소리가 나쁘지 않다며 엑스레이를 찍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제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새 아이에게 감기가 옮았는지 나도 감기 기운이 있었다. 같이 진료를 보고 수납을 하려는데, 아직 내 처방전이 나오지 않았다며 좀 더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15분가량을 더 기다렸다. 기다림에 점점 짜증이 나는 것이 표정에서도 드러났는지, 수납 직원은 거푸 사과했다. 늦어지는 게 직원의 잘못은 아니다. 지난주 내내 휴가였으니 오랜만에 진료를 보셔서 그런 것 같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약국에서 처방전을 냈더니 또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내 처방이 잘못 나왔다고 했다. 성인인데 복용량이 어린이 양으로 처방이 나와 확인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게 20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약을 받을 수 있었다. 집에서 출발해 약을 받는 데까지 총 4시간이 넘게 걸렸다.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이제 한 시간을 더 달려 집에 가야 한다.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국도로 가나 고속도로로 가나 걸리는 시간은 크게 차이가 없지만, 왠지 이 상태로 국도를 운전하면 사고가 날 것 같아 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그제야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미세먼지 없이 푸른 하늘이 높다. 때마침 손양 졸음쉼터를 지났다.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 나올 것이다.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삼분쯤 더 달리니 오른쪽에 '대청봉'이라고 쓰인 익숙한 표지판이 보였다. 길을 바라보던 시선을 살짝 위로 들어 장면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높은 산이 보인다. 일직선의 고속도로 위, 전깃줄 하나 없이 탁 트인 하늘과 멀리 보이는 높고 커다란 산봉우리가 시원하다. 산등성이 제일 왼쪽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설악산 대청봉이다. 설악산 근처에서는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설악산과 접해있는 속초, 고성, 양양을 통틀어 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봉우리를 볼 수 있는 곳이 딱 두 군데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동해고속도로 속초 방면의 이곳이다.
시원시원한 풍경을 보고 나니 지쳐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그까짓 몇 시간 기다리는 게 왜 그리 짜증이 났을까. 애가 심각하게 아프지 않다는 안도감에 시간이 아까워진 것은 아니냐고 산이 내게 되묻는 것 같았다. 분명 병원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폐렴만 아니게 해달라며 빌었다. 아이가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해도 모자랐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기다림은 아이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대가였을 뿐이다. 돌아보니 오늘은 짜증 나는 하루가 아니라, 그저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