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겨울을 건너는 법

얼어붙은 마당에서 배운 마음 한 줌

by 이수정

오늘은 한동안 몰아치던 추위가 한풀 누그러졌다. 추울 땐 어디를 가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건물 밖 화장실을 다녀올 때 겉옷을 걸치지 않으면 이가 딱딱하고 부딪힐 정도로 시린 날씨다. 내 몸이 추운 것만 신경 쓰다 보니 마당의 식물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부지런한 시아버지께서 그 혹한을 이겨내며 관리를 해두셨다.



새 삶을 찾은 딸기들

시아버지(이하 아버지)의 취미는 낚시와 식물 기르기다. 아버지의 손은 그야말로 ‘녹색의 손(Green thumb)’이다. 식물계 마이너스의 손인 내가 다 죽게 만든 화분을 덜컥 안겨드려도 어느새 싱싱하게 되살려내신다. 한 번은 내가 키우다 방치해 버린 딸기 화분을 가져가시더니, 다음 해에는 몇 알이지만 싱싱한 딸기를 따서 건네주시기도 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국화

아버지의 덕분에 봄부터 가을까지는 사무실은 작은 화원이 된다. 나는 식물을 ‘구분’할 줄만 알지 ‘기르는 법’은 모르는 사람이라, 그저 계절마다 꽃향기를 공짜로 누린다. 날씨가 조금 풀린 김에 오랜만에 아버지의 화분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마당 구석에서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던 건 둥굴레와 은방울꽃 군락이다. 못쓰게 된 고무대야에 흙을 채워 몇 뿌리 심어 두신 게 지금은 대야를 가득 메울 만큼 번성했다. 그 작은 은방울꽃이 그렇게 진한 향을 품고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한동안은 하던 일도 잊고 은방울꽃 무더기 앞에 앉아 올망졸망한 꽃모양을 지켜봤다.


잠들어있는 둥굴레와 은방울꽃

지금은 두 군락 모두 겨울잠에 들어있다. 달큰한 둥굴레꽃도, 은은한 은방울꽃도 없다. 푸르던 잎은 갈색으로 말라비틀어져 있지만,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살아남아 긴 겨울을 이겨낼 것이다. 봄이 오면 또 파릇한 싹을 틔우겠지.


시들어버린 돌단풍과 파릇한 달래

회사로 입구의 돌담 아래에는 돌단풍이 한 무더기 자리 잡고 있다. 그 주변에는 달래가 자라는데, 지금은 겨울이라 통통한 아기 손바닥 같은 돌단풍잎은 다 시들어버렸다. 그래도 바스러진 잎 사이로 파릇한 달래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달래는 내가 좋아하는 식물이다. 뿌리가 통통한 달래를 송송 썰어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 참깨를 듬뿍 넣어 만든 달래간장과 구운 김 만으로 밥 두 공기는 거뜬하다.


재작년 봄, 돌단풍 근처의 달래를 캐보겠다며 낑낑대고 있으니 아버지가 뭐 하냐고 물으셨다. 달래를 캐고 싶은데 돌단풍 뿌리가 다칠까 봐 조심해서 파고 있다 하니, 아버지는 “뭐 그까짓 거.” 하시고는 호미로 돌단풍을 통째로 들어내셨다. 그리고 큼지막한 알뿌리의 달래를 한가득 내 손에 쥐어주시며 “손질은 네가 해라.” 하셨다.

무뚝뚝한 말투지만 그 안에 있는 상냥함은 숨길 수가 없다. 시엄마가 어디서 났냐고 물으시기에 돌단풍 사이에서 캤다고 말씀드렸고, 그날 캔 달래는 향긋한 달래간장이 되어 회사 식구들의 점심반찬이 되었다. 다만, 작년 봄에는 달래의 위치를 기억한 시엄마가 나보다 먼저 캐가셔서 허탕을 쳤다.



초콜릿향의 온시디움 판타지아

아버지가 추위를 피해 사무실로 들여놓은 화분 중에 ‘온시디움 환타지아’라는 난도 있다. 뿌리 근처로 둥글납작한 알집 같은 게 있고, 그 알집에서 길쭉한 잎이 뻗어 나오는 식물이다. 꽃에서는 은은하게 초콜릿향이 난다. 비슷하게 생긴 막실라리아 화분이 두 개나 더 있는데, 이쪽은 잎이 더 얇고 길며 꽃향기도 다르다. 막실라리아는 깊게 볶은 원두커피 향이 난다.

온시디움꽃에 코를 바짝 들이대고 향을 맡고 있으니, 시엄마는 ‘쟤 또 시작이네 ‘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겉보기엔 아무 냄새도 안 날 것 같은 작은 꽃에서 어떻게 이런 향기가 나는지, 나로서는 그저 신기할 뿐이다.


통통하게 털이 찐 참새

얼어붙은 마당과 사무실로 들여놓은 화분들을 둘러보고 나니, 겨울이 그저 모든 것을 멈춰 세운 계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곳에 뿌리가 살아 있고, 나보다 먼저 손길을 주는 사람도 있다. 추위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봄이 오면 다시 꽃향기를 맡으며 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지. 그때까지는 이 고요한 겨울을 천천히 지나 보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당신과 걷는 하루, 상도문 돌담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