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첫 버킷 리스트는 커플링이다.
주얼리 매장 가서 사면 참 쉬운데
굳이 만들고 싶단다.
멀고 먼 홍대에 반지 공방을 찾았다.
사실 커플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반지라는 걸 손가락에 끼우는 게 불편하다.
그래도 그녀가 원하니 내색하지 않고 따랐다.
반지 공방에는 우리를 비롯해 3팀이 모였다.
귀여운 딸과 반지를 만드는 아빠.
우정 반지를 만들러 온 중국 친구들.
먼저 반지 호수를 고른다.
손가락 굵기에 맞는 반지를 선택한다.
한국 평균은 여자 12호, 남자는 17호다.
그녀는 14호, 나는 25호를 선택했다.
직원이 깜짝 놀란다.
이렇게 굵은 분은 처음 봐요.
한 덩치 하기는 하지만 손가락이 유독 굵다.
호수를 고른 후 연마작업을 한다.
무광, 유광을 선택할 수 있고 부분적으로 넣을 수도 있다.
심플한 디자인을 새기고, 안쪽에 이니셜도 넣었다.
손재주가 없어도 직원분이 도와주니 망칠 걱정은 없다.
약 한 시간을 공들여 커플링을 완성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손을 포개고 연신 사진을 찍는다.
커플링을 맞추니 정말 연인이 된 기분이다.
몇 달 전 우연히 받은 메시지 하나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11살 차이라니... 도둑놈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다.
반지공방을 나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녀가 찾은 메뉴는 파스타, 피자였다.
파스타를 하나씩 시키고 피자를 나눠 먹었다.
그녀는 고르곤졸라 피자를 좋아한다.
토핑 없이 치즈만 깔린 피자다.
자고로 피자란 야채, 고기, 햄이 듬뿍 있어야 맛있는데
그녀는 나와 정반대다.
고르곤졸라 피자에 꿀을 잔뜩 찍어 먹는다.
난 단 걸 싫어한다.
우린 입맛이 참 다르다.
식사 후 설빙에서 디저트를 먹었다.
리얼메론통통을 주문했는데
메론 반 개가 그대로 나왔다.
데이트를 해 본 지 참 오래됐다.
밥 먹고 디저트를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나이 먹고 커플링이라니...
지금 상황이 웃기면서도 재밌었다.
모든 걸 그녀에게 맞춰 주었다.
날 보러 한국까지 찾아온 그녀다.
그깟 메뉴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
그녀 앞에서 번역기를 켜는 게 부끄럽다.
무슨 말이야? 되물으면 대화가 끊긴다.
적당히 알아듣고 적당히 대답한다.
점점 대화가 되기 시작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내가 좋아하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그녀가 좋아하는 고르곤졸라 피자에 칵테일을 주문한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수록 마음도 깊어간다.
내가 회사에 있는 시간 동안 그녀는 학원을 다녔다.
영어학원을 그것도 한국에서 다닌다.
영어를 잘하면서 더 잘하고 싶나 보다.
6시에 회사 앞에서 기다릴게.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학원 끝나고 회사로 오겠단다.
외국 여자가 회사 앞에서 날 기다린다니...
동료들의 눈길을 받을게 뻔했다.
개인사는 절대 공개하지 않았는데
오늘 만천하에 드러나겠지...
뭐 그래도 상관없다.
날 보러 오겠다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퇴근길 회사 앞, 그녀가 서 있었다.
175cm의 러시아 여자가 나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주변 동료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녀의 손을 꽉 잡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