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마감하는 피곤한 밤, 머릿속을 울린 딸아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풀려버린 눈꺼풀을 힘주어 치켜들며 되물었다. 지난 1학기때 회장선거에 나가서 고배의 쓴맛을 본 녀석이기에 이번에도 도전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녀석은 무슨 생각인지 잔뜩 신이 나 보였다. 연설문을 작성해야 한다면서 방에서 뭔가를 골똘히 끄적였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오빠가 썼던 공약을 적으면 안 되냐고 당차게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회장선거는 왜 나가려는 거야?"
"그냥 회장이 하고 싶어 졌어."
이번 학기에 부회장에 당선된 오빠에게 자극을 받은 것일까? 어쨌거나 스스로 나서서 해보겠다는 건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런 딸을 위해 녀석이 적어 온 연설문을 살펴봤다.
"근데 공약 3가지가 다 같은 말 아니야?"
녀석이 내세운 공약은 웃음 가득한 학급, 폭력 없는 학급이란 내용이 단어만 바뀌었을 뿐, 매미울음소리처럼 반복되며 맴맴 거리고 있었다. 녀석이 쓴 글을 보기 좋게 살짝 수정해 줬다. 어려운 단어가 들어갔다며투덜대던 녀석도 내심 기분이 좋은지 방에서 열심히 연습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어느 쪽을 응원할까?
성공? 실패??
실패를 응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우리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는 한마음일 테니..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성공하지는 않는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아이들 주위엔 늘 실패한 아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실패한 아이들은 불행할까?
개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충분히 속상해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툭 털고 일어선다. 아이들에겐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산스럽게 단장하는 딸내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귀엽고 예쁜 친구가 회장으로 뽑힌다며 오늘만큼은 한껏 멋 내고 갈 작정이다. 예쁘게 반묶음을 하고 커다란 리본을 꽂았다. 손끝이 야무진 딸은 혼자서도 척척 잘 묶는다. 마무리는 내가 직접 고데기로 머리카락 끝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말아줬다.
가방 메고 나서면서 녀석은 인기 많은 친구가 있어서 아무래도 떨어질 거 같다고 무심하게 얘기했다.
"괜찮아. 엄마 눈에는 우리 딸이 제일 예쁜걸?인기투표하는 건 아니잖아?"
"인기투표라고!!!"
아......
성적으로 후보를 정했던 우리 때와 달리 자원하면 누구나 후보에 오를 수 있는, 요즘 회장선거는 많이 다르구나..
"뭐 어때? 회장선거에 나가겠다고 한 게 더 대단한 거야. 떨어져도 괜찮으니까 기죽지 말고 씩씩하게 잘하고 와~!"
딸을 마중하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엄마의 직감은 언제나 정확하다.
평소 가지 않던 학교 앞으로 가겠다고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녀석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가 엄마보다 더 잘 따르는 이모와 할머니도 지원사격을 나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녀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끝났니? 어디야? 어떻게 됐어?"
녀석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대답했다.
"지금 계단 내려가고 있어... 나.. 떨어졌어..."
아아... 안될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학교 앞에 나와있는 내가 미워졌다. 당선돼서 함께 기뻐하기보다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거 같다. 쓸데없이 정확한 직감에 화가 났다.
녀석이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손을 흔들자 딸아이가 나를 발견했다. 녀석을 와락 안아줬다.
"괜찮아.. 잘했어!고생많았지?"
떡볶이를 먹으며 딸아이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원래 후보에 없던 친구가 다른 친구의 추천을 받았는데 그 친구가 당선됐어. 연설문은 내가 제일 길게 써갔는데 인기 많은 친구가 뽑힌 거야. 남자 회장은 삼행시를 해서 당선됐어. 나도 삼행시를 준비할걸 그랬나 봐."
수다쟁이 모드가 켜진 딸아이의 푸념을 가만히 들어줬다. 떡볶이를 맛있게 먹으며 얘기를 쏟아내는 녀석의 얼굴엔 수많은 표정들이 오고 갔다.
"잘했어! 내년에 또 나가면 되지!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무심결에 뱉은 말에 녀석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응! 나 내년에 또 나갈 거야! 꼭 회장을 해야겠어."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 대견했다.
예전에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 기억났다. 초등학생 아이가 5년 만에 회장에 당선됐다는 내용.. 모두가 아이의 끝없는 도전에 박수를 보냈다.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우리도 내일처럼 환호했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확률적으로도 실패가 더 많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주저앉지 말고 다음을 위한 밑거름으로 사용한다면 아이들은 더욱더 단단한 보석이 될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지지를 받고 더 크게 성장할 것이다.
딸아이의 낙선 소식을 접한 남편은 어제저녁 자기 전에 녀석이 했던 말을 전했다.
"오빠는 하는 것마다 다 잘 되는데, 왜 나는 다 안 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딸아이가 오빠와 자신을 비교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짧은 생애 유난히 승리의 깃발을 자주 뽑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을 볼 때마다 행복했지만 언젠가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될 날을 생각하면 심란해지곤 했었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지금의 영광이 평생 가지 않는다. 계속해서 도전해야 할 과제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성공과 실패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살아가는 일부이고 경험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