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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Jun 08. 2019

범람: 서툰 진심

- 이해의 무거움

  결국 몹시 서운했던 이들 앞에서 울고 말았다.   


  이건 아닌데 싶었는데, 누군가 툭 하고 팔꿈치만 건드려도 범람할 것 같은 그런 날들이었다.

  참고 누르고 견뎠던 날들이 몹시도 초라해지는, 처음인 듯 정말 새초롬하게 울고 말았다. 스트레스가 과했고, 또다시 과호흡 증후군이 찾아오고, 팔다리가 저리고 아파 후들대는데... 이 눈물의 정체를 어찌 말해야 할지 막막해져서 눈물이 그쳐 지질 않았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내가 아파서 우는지, 울고 싶어서 아픈지조차 모르게 가슴이 쿵쾅대서 돌아오는 차에서 실없이 피식 댔다. 왜 그러냐고 묻는데도 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은 결국 내 예민한 감정의 균열을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았던, 그래서 나 혼자 너무 오랫동안 팽팽해져 있었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나와 조금이라도 닮은 섬세한 타인이 그리웠던 게지.

  누구라도 나를 눈치채 주길, 범람하는 나를 눈치채 주길 바랬던 거겠지.     



  




  종종, 오해하지 않기 위해 이해를 택한다.

  이때의 이해란 제법 처절한 구석이 있어서 나를 오롯이 내려놓아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내 입장을 설명하지 않으려 무단히도 애써야 한다.

  혀를 통제하는 일은 이토록 어렵다.

  말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써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 자만이 안다.

  결론은 없다.

  상대가 끝까지 몰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거기까지가 이해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는 이해의 무거움이다. 

 


  언젠가 엄마와 함께 일본을 다녀왔다.

  해외여행뿐 아니라 거의 온전한 여행이 처음인 엄마는 고작 3박 4일에, 내 생애 아무것도 안 하고 이렇게 오래 쉰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손끝이 저려왔다. 엄마를, 3박 4일을, 아무것도 안 하고 오로지 쉬게 한 것, 내 생애 처음으로 엄마에게 잘한 짓이라 생각했다.

  오래전 엄마의 허름한 가계부에서 '고독하다'라는 글을 발견하고 나는 얼마간 멍해있었다. 그 말을 뱉기까지의 시간들을 나는 얼마나 짐작하고 있을까. 짐작만으론 곁에 함께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근본 없는 이해만큼 가벼운 게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내 얘길 하는 게 힘들어진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부득이하게 어설펐던 지난날들이 더더욱 방황이나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기보다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재단의 한 방편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말 수가 줄어들기도 했다.

  그냥 적당히 감추고 숨어 지내는 것이, 저도 그래요, 사는 게 그렇죠 뭐, 와 같이 누구나 할 법하게 순하게 대응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의 잡담조차 끊게 만들기도 한다.
 
   날이 갈수록 마음에 꼭 맞는 사람도 만나기 어렵다. 가까운 친구조차 말이다.

  제법 의리 있고 제 사람은 칼 같이 지킨다는 인상을 풍기는 A도 서운한 감정이 들면 칼같이 끊어버리거나, 자신이 이만큼 했으니 상대도 이만큼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철저한 논리가 있다. 그게 의리 있다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지 않으면 의리를 빌미로 관계를 더 이상 지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터졌을 때,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전화나 안부를 물어온 사람을 체크한다거나 친구라면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는 식의 유치함이, 그것을 미끼로 A는 남들에게 나를 너무나 잘 안다고 말하고 다닌다거나, 그런 식이다.
 
   비난하고 화를 내고 잘잘못을 따지던, 쌈닭 같던 내가 얼마나 온순하게 변했는지, 사람들은 가끔 의아해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반투명해졌다. 환히 보이는 듯하지만, 전혀 내보이지 않는.

  어쩌면 불투명보다는 반투명이 더 나쁘다. 공유와 은폐가 남몰래 투명과 불투명의 경계를 드나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A보다 더 나쁜 족속이다.

  귀찮음과 온갖 상념으로, 집요하게 나를 분리시키는.  

  

  그러나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모든 것이 나의 진심이었다.

  비록 서투르다 할지라도.  

  누군가의 냉기를 이해하는 순간 나도 그를 닮아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어 주는 것이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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