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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퇴근

격하게 출근이 하고 싶지만

by 태생적 오지라퍼

교사는 방학이어도 재택 근무인셈이다.

41조 연수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집에서 컴퓨터 앞에 딱 붙어있어야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만.

수업 준비나 교사 역량 강화를 위해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재택으로 근무하게 해준다는 넓은 뜻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업무가 있으면 방학 중이라도

학교에 나가는 일이 종종 있고

아마도 2월 마지막 2주 정도는 교사마다 업무에 따라서 매일 학교에 나갔을 수도 있다.

올해부터 교육과정이 바뀌는 고등학교 1학년은

다양한 선택과목들 때문에

어제까지도 시간표가 확정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면 해당 업무 관계자들은 출근 혹은 야근도 해야 한다.

방학이라고 모든 교사들이 마음 편하게 놀러다니기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오늘 방금 전 네시 삼십분까지 재택 근무였던 셈이다.

그리고 네시 삼십분에 마지막 퇴근을 했다.

물론 평소처럼 칼퇴이다.


점심때 학교 교직원 단톡에 안녕을 고하였고

세시쯤 인스타그램에 위 사진을 올리고

(왜 저 사진을 선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다란 나무들 중에서 새집이 있는 나무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새들은 어떤 기준으로 나무를 선택해서

보금자리인 둥지를 마련하는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예전부터 있기는 했다.)

특별히 배경음악을 고르다가(보통은 음악을 넣지 않는다.)

너무 뻔하지만 [015B의 이젠 안녕]을 깔고

<감사합니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라는 문구를 넣었으니

웬만큼 센스가 있는 사람이면 나의 정년퇴직을 다 눈치챘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이제

마지막 퇴근을 한 셈이다.


인스타그램을 올리고 댓글을 보면서

(감사하다고 보고싶다고 꼭 놀러오라고 해주었다. 고맙다.)

눈물을 조금 훔친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고양이 설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 것 빼고

휴가를 즐기고 있는 무심한 아들 녀석이 톡하나 없는 것도

항암 기간 중 컨디션 유지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남편이 나의 심난함을 알아주는 것도

그러려니하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평온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아들과 아버지이다.

네시 반이 지나서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하 커뮤니티센터 사우나에 다녀왔고

나름대로 많이 애썼으나 체중은 48.5Kg을 유지중인것을 확인했고

봄동은 양파와 함께 겉절이로(일부 샐러드거리는 남겨두고)

꽈리고추와 마늘은 소고기 넣어 졸임으로 변신시켰고

콩나물은 다듬어서 내일 무 채썬 것과 함께 콩나물무밥으로

(아들 녀석이 오늘 저녁까지 먹고 늦게 귀가하신다해서 계획을 하루 늦췄다.)

남은 무로는 칼칼한 오징어 무국 끓일 휴일 식사 메뉴까지 결정하였다.


오늘 나의 유일한 대화는 오랜만에 연락을 준

대학 후배이자 서울대 대학원 랩방에서 같이 있었던 박사님이다.

현재 모과학관에서 근무하고 있고

페이스북으로만 서로의 근황을 알고 있는 정도였는데

퇴직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과학관에서 하는 과학프로그램 논의를 함께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주었다.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제일 기뻤고(관심이 가장 기쁠 나이이다.)

아직 나의 능력이 쓰일 곳이 있다는 것을 조금은 인정받았다는 것도 기뻤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든 해보는 것이 낫다.

2025년 2월의 마지막 날.

나는 칼퇴를 하였고 이제 다시는 그 자리로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오늘 글까지만 이런 퇴직 타령을 늘어놓으려 한다.

내일부터는 제 2의 인생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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