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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cent Feb 02. 2022

인간

인간을 설명하는 두 개의 장면


 "MBTI가 어떻게 되세요?"


근래 들어 사람들의 대화 주제에는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MBTI란 4가지 척도를 각각 상반된 2가지 유형으로 판단하여 4개의 연속된 알파벳을 부여하는 '심리유형 검사'이다. 총 16가지의 알파벳 조합 중에서 하나의 조합을 부여받는 이 검사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설명할 '도구'를 얻는다.


"당신의 부캐는?"


여기 또 다른 현상이 있다. '부캐'라는 구체적인 단어로 조성된 새로운 유형의 문화는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를 통해 촉발되었다. 유재석이라는 걸출한 예능인이 시도하는 다양한 도전을 통해, 기존에는 생각지 못했던 성향의 일을 경험하면서 시청자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상당히 강력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는 것에 사람들은 공감했던 것이다.


 MBTI와 부캐가 동시대인들에게 각광을 받는 현상은 겉보기에 상당히 이질적이고 모순적이다. 한쪽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특정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시킨다. 인생이란 원래 이토록 모순적인가? 하지만 그 맥락을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한다



선택해야 하는 인간


 인간이 꼽는 최고의 가치는 단연 '자유'이다. 인간의 고민은 언제나 자유를 얼마나 발휘할 수 있는지에서 비롯되고, 다른 사람과 갈등을 빚게 되는 가장 큰 충돌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자유'라는 가치가 주는 폭력성을 우리는 쉽사리 인지하지 못하는데, 그 폭력성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온전한 자유를 향유하는 측면보다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문제야말로 인간이 처한 딜레마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선택하는데 기준이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취해야하는 정보들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자유'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무감각해지는 경향도 발생한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가치를 그것의 복잡한 맥락이 아니라 자의적인 해석으로만 받아들이게 되는 철학적 도피를 택한다. 결국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고찰하기도 전에 자유가 가져다주는 불안을  애써 외면하고자 한다


이런 한계 속에서 결국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유를 특정 권력자에게 넘기기도 하는 우를 범했다. 바로 나치즘파시즘의 출현이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내가 분석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근대인이 아직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9~10pp.

 

지속되는 딜레마, 선택할 자유와 선택하지 않을 자유



 에리히 프롬이 밝혔듯이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막상 자유가 가져다준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MBTI부캐 현상을 다시 살펴보자. 인간은 혼란스러운 정체성 속에서 자신을 특정해 줄 무언가를 찾으려 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가두려고만 하지 않으려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유'가 가져다주는 딜레마는 언제고 하나의 동전처럼 함께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의 지향성은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는 다양한 존재가 다양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기에, 누군가에게 자유를 속박당해서 사는 것은 획일화된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사회가 비극으로 매몰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다양한 시선을 가둬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인류를 진보하게 하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일지 그리고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를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타인들의 기대에 순응하고 남들과 다르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 회의는 잠잠해지고,

어느 정도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한 것은 삶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262p.


"밸런스 게임을 시작하지"


 이런 딜레마 속에서 현대 한국인은 최고의 게임을 발명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밸런스 게임'이다. 굉장히 사소하고 유치한 질문부터 철학적인 질문까지 우리는 제시된 양극단의 상황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자유'가 가져다주는 혼란을 조금이나마 질서 있게 만들려는 본능적인 노력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우선순위를 만드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우선할 것인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 개인의 삶에서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살피고, 왜 그것이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보고, 그것이 정말 합리적인 판단인지를 다시 질문한다. 그리고 다시 고민해본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이 다룰 자유를 조금씩 마주하려는 노력을 해간다. (다만 탕수육은 소스를 부어먹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급격한 기술의 진보로 21세기 지식사회를 넘어 초 연결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 인류는 과연 자신의 자유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현명하게 누리려고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혐오가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
그리고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 Anti-intellectualism)의 굴레


인간의 이성이 인류를 진보하게 한다는 자신감으로 나타난 모더니즘(Modernism)을 바탕으로 근대화에 앞장섰던 과거의 사람들은 두 차례 커다란 전쟁을 겪게 되었다. 바로 1, 2차 세계 대전이다. 맹목적인 과학화로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라 불리는 단순화 경향을 지향했던 당시 인류는, 결국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을 경험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단 하나의 법칙이 존재할 뿐이라는 맹목적인 믿음과 단순한 판단은 인간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존재인가를 여실히 드러낸 비극이 되어버렸다.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량학살)를 자행했던 나치즘의 우생학(優生學, Eugenics) 역시 그렇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누구도 의심치 않고 당연히 받아들였던 기존 관념과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이후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의 출현이다. 기존 관념의 해체는 결국 인류 사회의 주체가 다양성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로 인해, 특정 시각이 아닌 다양한 시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며,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복잡한 역학이 인간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듯 인류가 나아가고 그 속에서  자유를 실천하는 각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굴곡 깊은 역사마저도 오늘날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히기 시작하는 듯싶다. 뉴스를 비롯한 기성 매체들은 또 다른 종교가 되어 '원하는 메시지'만을 생산하고, 검증 없이 생산되는 뉴미디어알고리즘 시스템의 굴레는 '확증편향'을 더 공고히 하며, 세계 패권국 미국에서는 의회주의가 무시되는 트럼피즘(Trumpism)이 꺼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다양성의 중요성을 값 비싼 대가를 치러 얻었음에도, 다시 혐오와 차별로 점철되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 때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각종 언론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이에 대해 시민사회의 자정적인 노력이 발현되어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문화를 배격하고자 하는 흐름이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주요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에서 혐오 발언은 가장 많은 추천 수를 받는 경우가 많아져버렸다. 어느샌가 우리는 복잡한 맥락을 살펴보기보다 단순하게 조각되고 편집된 정보로 타인을 바라본다. 미디어는 무엇을 '말하고 혹은 말하지 않을지' 교묘히 편집하고, 메시지(message)가 아니라 메신저(messenger)를 공격하며 대화를 거부한다. 우리는 다시 우리들의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 채 세상 밖으로 나아가려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이 우려했던 '자동인형'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다시, 코스모스(Cosmos)


과학 대중화를 위해 우주과학 서적을 집필하고자 탄생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훌륭한 과학서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인문서이다. 인간의 호기심을 한 없이 발산하며 우주를 향해 탐구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자가 종국에 던지는 질문은 '인간은 무엇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가'이다. 그래서 칼 세이건 하늘 높이 시선을 두어 우주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시선을 다시금 인간에 수렴시킨다.


 그는 <코스모스>를 통해 계속해서 질문으로 던지고 그것의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이 곧 인류의 역사이자 인류의 의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제는 발간된 지 수십 년이 흐른 이 책이 현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가 던지는 물음이 완성의 영역이 아니라 지속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즉 칼세이건이 <코스모스>를 통해 전하는 것은 지식을 향한 태도주지(知, 여러 사람이 두루 앎)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해 보면 알아낼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이 가능하고 과학이 밝혀낸 지식을 이용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어찌 보면 이상한 사상이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대체적으로 경험 법칙에 의존하던 과학의 영역을

신비주의와 미신이 치고 들어온 것이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107~111pp.


인간은 어렵게 답을 찾으려 고군분투하기보다 절대적인 존재를 통해 자신의 무지를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쉽고 불안감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 지성의 한계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조금씩이나마 발전해올 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관념 자체를 의심하는 누군가의 매우 용기 있는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만일 행성이 ‘불완전’하다면,
 
그 궤도 역시 불완전하지 않겠는가?
 
케플러는 달걀 모양 곡선(타원)을 여럿 시험해 보았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139p.


어린 아인슈타인은 이 책을 읽고,

만약 빛의 파동을 타고 여행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400p.


 독실한 신자였던 케플러는 '신의 창조물'인 우주가 '불완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주 궤도의 형태를 이 아닌 '타원'으로 확정했고,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시간의 절대성'을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라는 개념으로 깨트렸다. 그리고 그는 당시 과학계의 기존 관념을 뒤흔든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기존의 잘못된 관념을 의심하고 새로운 해답을 내놓은 이들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은  진보였다.(진보가 반드시 좋은가에 대한 이야기는 논외로 하겠다.)


그들 역시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관해서 절대적인 존재를 받아들이는 미약한 개인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수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스로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조망(望, 먼 곳을 바라봄)하려했을 뿐이다.


칼 세이건이 과학혁명의 역사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단지 "정답"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다. 대신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자신의 생각을 얼마나 검증하고, 객관적으로 살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탈레스가 내린 결론의 옳고 그름은 큰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점은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택한 접근 방식에 있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349p.


'진정한 자유'란 <그리스인 조르바> 속 조르바가 말했듯이 약간의 '광기'를 가지고 '자신을 묶은 밧줄을 잘라내 자유로워질' 용기를 내는 능동적인 가치와 같다고 본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금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그 원인을 찾으려는 태도를 갖추고, 지난한 과정을 겪을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자유는 결코 꿀맛 같은 가치가 아니다. 온전히 우리가 감수해야 할 복잡하고 때론 버거운 가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는 카오스(Chaos)가 아닌 코스모스(Cosmos)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존재 아닌가?

이러한 사고의 혁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혼돈(Chaos)에서 질서(Cosmos)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343p.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 이국종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교실 외상외과 교수 | 인생 강연 강의 듣기 | 세바시 797회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1676965



참고자료


단행본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피 프롬,  <Humanist>, 2012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문학동네>, 2014

『코스모스』,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2006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09


영상

『5천만의 소리 지휘자를 찾습니다.(SDF2021)』

  "Session7 - 공동체 감정을 숙의하는 5천만의 지휘자", 이경원 SBS 기자, <SBS> , 2021.11.18.

『놀면 뭐하니?』, 기획 전진수, 연출 박창훈 외 5명, 작가 최혜정외 10명, <MBC>, 2019


기사

"美 주류로 진입한 '트럼피즘', 2024년 얼굴은 누가 될까?", 전홍기혜 특파원,<프레시안>, 2021.09.07.,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90517000556598#0DKU(검색일:202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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