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어릴 적, TV 화면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 번쯤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제법 진지하게 무슨 재주로 그 좁은 상자안에 들어갈지 고민했다.
거울을 보며 미스코리아는 일찌감치 포기! 노래는 좋아하지만 소질이 없었고, 춤은 마음만 S.E.S일 뿐 몸은 각목 그 자체였다. 결국 재능의 벽을 실감하며 그 꿈은 '어리던 시절의 귀여운 해프닝'으로 멀어져 갔다.
각목 웨이브와 풍선 인형의 추억
재능은 없어도 흥은 여전하다. 지금도 운전대를 잡으면 차 안은 나만의 단독 콘서트장이 된다. 댄스곡이라도 나오면 '둠칫둠칫' 몸을 흔들어보지만, 내 몸짓은 매장 앞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풍선 인형보다 못하다.
이 '몸치 DNA'를 확인사살했던 사건이 있었다. 어린이집 교사 시절, 운동회에서 사회자가 교사들을 불러내 춤을 시켰다. 학부모와 원아들이 지켜보는 절체절명의 순간. 점수를 따야 한다는 사명감에 혼신의 '각목 웨이브'를 선보였더니, 사회자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풍선 인형 댄스로 마무리하자
사회자는 "이제 그만 들어가셔도 된다"며 자비로운 점수를 주었다. 애쓴 보람은 있었으나, 내 춤이 누군가에게 충격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다.
콩 심은 데 콩 난 '아이돌 덕후' 남매
그런데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말은 진리인가 보다. 우리 집 남매는 나를 닮아 흥이 넘친다. 특히 아이돌에 눈뜬 첫째 덕분에 등굣길은 늘 여자아이돌의 노래로 가득하다.
집에 돌아오면 거실은 즉석 공연장이 된다. 첫째의 수줍지만 진지한 안무와 그 옆에서 씰룩거리는 둘째의 앙다문 입술, 꿀렁거리는 짧은 팔다리를 보고 있으면 피로가 싹 가신다. 비타민이나 박카스보다 훨씬 효과 좋은 '내 새끼표 댄스 영상'은 내 휴대폰의 보물 1호다.
내 꿈은 변신로봇
시장에서 꽈배기를 사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에게 물었다.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첫째는 의사, 수의사, 웹툰 작가, 아이돌…
하고 싶은 게 참 많다고 했다.
둘째는 변신 로봇이 꿈이라고 했다.
악당을 물리치는 게 멋지다며 진지하게 말했다.
속으로는 ‘굳이 로봇이어야 하나’ 싶었지만, 꾹 참았다.
힘들지 않고, 좋아하는 일이고,
돈까지 잘 벌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속물근성이다.
하지만 속물근성도, 부모 마음이다.
아들의 폭탄 선언, "나 여자가 되고 싶어!"
어느 날 저녁, 평화롭게 밥을 먹던 둘째가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자기는 왜 남자고 누나는 여자인지, 성별은 누가 정하는 건지 묻는 아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성별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아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불쑥 큰소리로 외쳤다.
"나, 여자가 되고 싶어!"
순간 정적이 흘렀다. 숟가락을 멈춘 채 남편과 나는 눈을 맞췄다. '이걸 어떻게 받아줘야 하지? 진지한 정체성의 고민인가? 아니면 그저 호기심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찰나, 정적을 깨고 남편이 차분하게 이유를 물었다. 아이는 미간을 종이처럼 구기며 억울한 듯 대답했다.
"나는 춤추고 노래하고 싶은데,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여자잖아! 그래서 나도 여자가 되어야 해!"
그 말을 듣자마자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나의 취향에 맞춰 여자 아이돌 노래만 듣다 보니, 세상의 모든 가수는 여자여야만 한다고 오해한 것이었다.
"남자도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이 될 수 있어!"라고 안심시켜 주자, 아이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하게 웃으며 재차 확인했다.
"그럼 나 이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 될래!"
수많은 꿈 중에서 네가 행복할 자리를 찾기를
블록을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보니,
'변신 로봇'이었던 이전 꿈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 듯하다. 이번 꿈은 또 얼마나 갈지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건 그만큼 아이의 세상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증거니까.
수많은 꿈의 길목 중에서 아이가 정말 행복한 자리를 꼭 찾기를 바란다. 그 과정이 비록 '각목 웨이브'처럼 엉성할지라도, 언제나 뒤에서 격하게 호응해 주는 엄마 아빠라는 든든한 관객이 있다는 걸 아이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