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즈 앤 올'이 보여주는 거대한 성장통과 사랑

시네마스토리 03번째 이야기

by 하은

우린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먹고 삼킬 정도로 그 존재를 뼛속 깊이 새기는 두 청춘의 이야기는 '본즈 앤 올'의 제목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강렬함에 이끌려 이들과 엔딩을 향해 달리다 보면 이제는 강렬함보다 이터들의 세계에 동화되어 같이 아파하고 있을 타인이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낯선 세계에 들어서며 사랑을 향해 달리다가 서로의 모든 것을 삼켜낸 '본즈 앤 올'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 이터들의 세계


그들의 욕망은 다소 1차원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터'들의 욕망은 '먹는 것'이다. 그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이 다소 폭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매런은 그 욕망에 있어서 계속해서 정의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이다. 잠시 이터들의 세계를 떠올려보자.


이터들에게 놓인 현실 세계는 가혹하다. 무엇보다 이터들이 이 세계에 공존하는 것은 마치 돌연변이가 인간 틈에 섞여 평범하기를 갈구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놓인 욕망이라는 문제는 이터들의 세계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돌연변이이자 별종처럼 보이는 이들은 언제나 먹기 위해 움직이고 먹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들이라는 건 영화 속에서도 계속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먹고 싶다는 욕망을 애써 꾹꾹 누르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그 욕망에 굴복한다. 그건 이 영화의 안타고니스트이자 악당인 이들과 또 다른 이터에게서 볼 수 있다. 이들의 욕망은 다소 인간다운 모습과 거리가 있지만 욕망에 대처하는 모습은 인간의 어느 감정과 비슷하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끌리는 것처럼.


그렇다면 주인공인 매런은 이 이터들의 세계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일까?

매런은 평범한 본인의 모습 속에서 언젠가부터 이터와 같은 욕망을 포착하게 된다. 먹고 싶다는 이 단순해 보이는 욕망은 매런이 곧 이터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시작점으로 작용한다. 매런은 이제부터 이터의 세계와 여전히 자신이 믿고 있는 이전의 자신의 세계 사이에 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이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무언가 먹고 싶다는 욕망은 매런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매런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성장의 과정에 필요한 성장통처럼 작용된다.

그런 이터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담근 자신을 발견한 매런에게 나타나는 건 다름 아닌 소년 리이다. 그도 그녀처럼 이터의 세계에 들어온 또 다른 타인이다. 매런은 이 리라는 인물을 통해 또다시 이터의 세계를 주목한다. 리도 이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연한 만남에서 만난 타인이 자신과 닮았다는 그 동질감이 느껴진 순간.


그녀는 이제 이터의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 완전하지 못한 사랑으로부터


이 영화 속 사랑의 형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카니발리즘적 요소이다.


날 사랑하고 먹어줘.


이 문장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각자의 결핍이 분명한 인물들이면서도 그 욕망이 뚜렷하다. 하지만 이 욕망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면서 느끼는 사랑과 더불어 많은 감정들이 자연스레 피어나는 것처럼 비슷하게 그들에게 다가간다. 때로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죽을 만큼 괴롭게 파고들어 괴롭히기도 한다.

이건 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떠나 이터들이 아닌 인간들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그 욕망 속에서 서로를 주시하고 있다. 욕망이 하나의 키워드라면 또 다른 키워드는 비슷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동 떨어져 있는 둘일 것이다.


완전하지 못한 사랑과 불안한 세계 속에서 떠도는 인물들이라면 어쩐지 빈틈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걸 쌍방구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 속 매런과 리도 쌍방구원의 길에 놓인 서로를 보여주었으니까 말이다. 매런의 이터라는 빈틈에 리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생긴 동질감은 매런의 구멍을 서서히 메워준다. 그 방식이 다소 타인을 먹어야 하는 이터의 욕망을 실현하고 받아들이는 적응의 과정을 거치기까지 함께해 준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둘은 비슷한 서로에게 끌려 서로와 함께 한다는 그 동질감과 사랑으로나마 서로를 기꺼이 채워준다. 완전하지 못했던 사랑이 서로를 채우는 건 무엇보다 의미가 있지 않을까? 무언가 먹으며 채워야 하는 이터의 행위를 넘어서서 감정을 채우는 인간으로서의 모습도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생각해 보면 비슷한 결핍과 서로를 닮은 돌연변이.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들의 사랑이 다소 완전하지 못해 보여도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이들의 순간에는 괴로운 순간도 아픈 순간도 무엇보다 서로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순간도 끝없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게 없었다면 이들이 이 여정을 끝까지 달릴 수 있었을까? 매런이 리를 먹어내야 하는 순간은 그녀가 완전히 이터가 되었다는 것과 이제는 그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여정의 끝에 다다른 것을 보여준다.

완전하지 못해서 그들의 세계가 아름다워 보이는 건 미학적인 것도 분명히 있지만 이들의 세세한 감정 변화와 매런의 혼란이 어우러진 결과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는 내내 카니발리즘적 요소는 이런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도 같은 사랑을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요소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들의 이터로서의 삶이 낯설면서도 매런과 리에게 놓인 상황은 오히려 판타지적 요소로 끌어들였으니 말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매런과 리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런 생각이 든다. 앞에서도 말했던 문장이지만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이유에 동감하며 어느새 욕망과 본능에 이끌리는 인간으로서의 세계가 주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이들처럼 서로를 삼켜낼 만큼 그 존재를 사랑하고 깊이 새긴다면 그게 사랑일 텐데. 그 사랑이 너무도 거대하다는 생각이 이 영화가 남겨준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