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1
고위험 신생아 살리기와 인공 유산
소아과학 수업이 간만에 재미있었다. 아이의 성장과 발달은 크게 흥미롭지 않았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작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진심으로 행복했다. 한 과목 안에서도 좋아하는 파트와 싫어하는 파트가 나뉠 수 있다니! 하긴 그러니까 세부 전공이라는 게 있는 거겠지.
오전에는 소아과학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생식의학 수업을 들었다. 유산과 유도분만, 태아 기형학 및 임신 시 약물에 대한 수업이었다. 수업을 다 듣고 나서 깊은 시름에 빠졌다. 분명히 몇 시간 전에는 힘들게 태어난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배웠는데, 지금은 다시 무로 돌려보내는 방법을 배웠다. 이래도 되는 건가.
분명히 나는 임신 중단에 찬성하는 쪽이다. 임신 유지 여부의 결정권은 그 몸의 주인인 여성에게 있으며,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아의 생존권이 여성의 생존권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 선택을 실행하는 쪽이 된다고 생각하니 같은 단어가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자책을 했다. 왜 지금까지 내가 인공유산을 집도하는 쪽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여기서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가. 내 손을 더럽히는 게 싫은 건가. 쉽게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한 움큼 쥐고 주변에 도움을 청했다.
한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기분이 이상할 수도 있겠군…근데 또 다른 부분에선 힘들게 낳는 거 배우고 또 그렇게 힘들게 낳은 아기 살리는 거 배우면 뿌듯하단 말이지?”
또 다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그래도 다 이유가 있으니 인류 지식의 역사에 있는 거겠지.”
어떤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삶이란 게 어디 쉬운 게 있겠소. 인생은 원래 개같아. 그리고 그 개 같은 인생에서 개같음을 나누어줄 몇 안 되는 사람이 의료인이지.”
마지막으로 한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민이 드는 지점에서 더 많이 배워 두는 게 미래의 나를 위해서도 내가 만날 환자를 위해서도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 아닐까?”
따스한 위로와, 어색한 다독임과, 기분이 나쁠 때는 좋은 풍경을 보고 좋은 노래를 들으라며 사진과 음악을 보내 주는 다정함과, 섬세하고 큰 마음 덕분에 열심히 공부하다 잠들었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 곁에 더 오래 오래 머물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