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자기 생에서는 주인공이야

스토너 - 존 윌리엄스

by 어제만난사람


32473327244.20230711115458.jpg




'적당히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고, 그만그만한 직장에 취직한다. 일을 하다가 괜찮아 보이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출산을 하겠지. 아이가 자라는 내내 시간을 쏟아붓고, 주변과 비교하며 나도 모르게 속물근성 가득한 아줌마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훌쩍 자란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 어느 날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어쩌면 손자나 손녀를 안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가까워지고, 꿈꿔 본 많은 것들을 실행할 용기도 배짱도 시간도 남아 있지 않을 즈음에야 인생을 돌아보며 난 왜 이것밖에 안되었던가, 난 늘 코앞의 것만 보고 살아왔구나 하는 후회를 하겠지. 질병과 노구는 내게 서서히 고통을 안겨주고, 그로 인해서건 아니건, 나는 반드시 죽게 된다.'



고1 국어 시간에 '나의 미래'에 대한 짧은 글짓기 숙제를 이렇게 써 냈더니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교무실 책상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쉰 선생님은, "네가 한심한 듯이 써 놓은 이런 인생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평범한 생이야. 이 정도의 삶이라도 누리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지는 아니? 거창하고 대단한 목표나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인생이 아니야."


삶의 무게도 모르면서 삶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중2병 걸린 제자를 걱정하며 선생님은 나를 타일렀다. 하지만 그런 충고도 그 시절 내 삐딱한 마음에 별로 와닿지는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숙제들은 '정답으로 여겨질만한 뻔하고 답답하지만 무난한 문장'을 적어서 냈는데, 왜 하필 그날은 나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 썼나 하고 약간 귀찮은 후회를 느꼈던 것 같다.



소문에 의하면 오래전 국어 선생님이 처음 학교에 부임하자, 총각 선생님들이 난리가 났었다 한다. 이미 결혼한 지 한참 지난 뒤의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도 내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웠을 정도니까. 수업을 잘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한 시간 내내 선생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도 감탄이 나오는 미모였다. 당연히 다른 여학생들도 선생님 예쁘지 않냐고 부러워했었고, 소문도 열심히 캐고 다녔다.


부임 초기, 선생님은 주변 남 선생님들의 구애를 모두 뿌리쳤다. 대신 선을 봐서 서울대 법대 출신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식 날, 선생님은 연예인 뺨칠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남편이 사법시험 2차에서 번번이 낙방하면서, 십 년 가까이 선생님이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 번씩 노처녀 선생님만큼이나 예민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조심해야 돼.'라고 아이들이 말했다. 이런 내막을 어찌 그리 자세히 파헤쳤는지 모르겠지만, 17살의 여자애들은 모였다 하면 남의 이야기를 지어 내서라도 하고는 했으니까. 나는 그 얘기들을 반은 믿고, 받은 안 믿었다.


하지만 그 소문들이 정말이라면 선생님은 자기의 인생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평범한 생'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실까? 나를 불러서 뭐라고 하신 그 모습에서 나는 이미 No라는 답을 본 것만 같았다.



다음 해에 국어 선생님은 내 옆 반 담임 선생님이 되었다. 1학년 때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거울을 많이 보던 여학생이 그 선생님 반에 배정이 되었는데, 그 애는 모범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날라리라기엔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거나 튀는 행동을 하는 애는 아니었다. 단지 외모에 대한 관심이 많은, 거울 공주 같은 아이랄까. 늘 앞머리에 구르프라고 부르는 헤어롤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고, 수업 땐 졸다가 지적받는 일은 있어도, 문제아는 아니었던 그 애가 어떻게 된 일인지 2학년이 되어서는 선생님과 불화를 못 견디고 결국 자퇴를 하고 말았다.


요즘이야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지만, 90년대에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자퇴는 좀처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애와 1년 내내 말도 몇 번 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더 심하게 불량한 아이들도 멀쩡히 잘 다니는 학교를 별문제도 없던 그 아이가 왜 그만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몇 친구들 얘기로 그 애는 학기 초부터 담임 선생님한테 찍혔다 했다. 볼 때마다 담임이 뭐라 하고 잔소리를 하면서 심하게 몰아세우니, 그러지 않던 애도 독기가 생겨서 점점 더 엇나갔고, 학교도 자꾸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 애가 1학년 때는 무던히 결석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절히 바란다는 '평범한 인생'이 선생님에게는 어떤 삶이었길래, 그저 거울보고 머리 빗고 꾸미길 좋아하는 아이를 학교 밖으로 내쫓고 싶었던 걸까. 염색을 하지 않아도 갈색으로 찰랑거리던 그 아이의 생머리와 투명하고 하얗던 피부,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거울을 보던 모습이 오래도록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그 애는 학교를 떠남으로써 내 마음속에 도장을 꾹 찍은 것이다.



한때 예쁘고 창창했던 선생님의 삶이 평범에도 미치지 못하게 몰락해 버린 것에 대해 날카로운 대칭축을 세우듯, 예쁘고 꽃 같던 다른 여자아이의 삶도 망쳐버린 것처럼 보였다. 물론 선생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조차도 아니었던 아이건만, 그 일로 인해 나는 선생님이 말한 삶의 가치란 것을 더 경멸하게 되었다. 내가 걱정이 되어서 나를 교무실로 부른 것이 아니라 내 글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고, 그래서 그녀의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에 나를 불렀다는 것을 알았고, 이상 대신 현실에 안주해서 사는 교사는 어떤 제자에겐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 같았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삶은 내가 쓴 냉소적인 글과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나름대로 행복과 가치 있는 무언가를 쫓는다고 애쓰며 살았는데, 막상 그러한 결과물을 완성했다 싶으면 일이건, 사랑이건, 사람이건, 어느 정도는 괴로움과 허무를 안겨주었다. 모든 기대는 배신을 예비해 놓은 선물 상자였던 것이다.


삶은 대체로 불행하고 힘겨웠으므로 세속적인 것들의 달콤함과 가벼움이 주는 즐거움에 안착하고 사는 게 뭐가 어떤가 싶어졌다.


나는 IMF 시대에 졸업을 했고, 고만고만한 직장이라 부르기도 뭣한 그런 작은 회사에 겨우 입사를 했다가 결혼을 하고 전력을 다해 아이를 키웠다. 어느 순간, 가치 있고 척박한 인생보다는 세속적일지언정 안락하고 부유한 삶이 더 나아 보였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겐 그 무엇도 없었다. 속물이면서 속물이 아닌 척 스스로를 기만하고, 알량한 정의로움 한 줌 정도 가진 고집스러운 아줌마가 되어 평범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 외에는.



어쩌면 선생님의 인생관이 옳았던 걸까? 자기 안의 이상에 헌신하기보다는 서로를 따라 하며 애쓰는 것이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게 하는 건 아닐까. 예의 바른 비굴함과 융통성은 어쩌면 그리 다르진 않은 건가.


찬란하고 파란만장한 위인, 영웅의 삶이 정답에 가까운 삶처럼 묘사되는 시대에, 소시민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답이 없는 문제, 길이 없는 길 앞에 있는 것과 같다. 이 암담하나 대부분의 우리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정답이 아닌 작은 위안을 보태는 책이 바로, 스토너였다.



스토너의 인생은 멋진 서사가 있지도 않고, 가정에서도 일에서도 성공이라 부를 만한 부분이 많지가 않다. 친구였던 데이브 매스터스처럼 삶의 구심점이 뚜렷한 캐릭터도 아니고, 고든 핀치처럼 처신을 제대로 할 줄도 모른다. 자신을 영문학 교수로 이끈 스승 아처 슬론의 외골수적인 면을 비판적으로 인지하였음에도, 나이가 든 그 또한 그러한 면모를 지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딸을 깊이 사랑했지만, 아내가 딸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쥐어흔드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체념했다.


때때로 그는 자기 삶을, 마치 다른 이의 것인 양 쉽게 저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결혼도, 양육도, 관계성에 있어서도.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스토너에게서 그나마 살아있는 것은 영문학에 대한 학자로서의 열망이었으나, 이 또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흔들리거나 꺾이곤 했다.


투쟁심이란 걸 좋게 보지는 않지만, 삶이 주는 시련과 사건들 앞에서 그것이 주는 의미를 반추하지 않고 순순히 안주해 버리거나 스스로의 생각만을 고집하는 태도가 그의 인생을 서서히 불행 속으로 밀어 넣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책은 스토너의 시선에서만 묘사되므로, 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디스나 로맥스 같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스토너가 이렇게 담백하고 납득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몰랐던 다른 이벤트들이 등장하면서, 그의 불륜이라든가 육아관이 딸의 몰락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소설이 스토너라는 당사자의 시선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굴곡 많은 인생도 정당화 될 수 있고, 피해자와 가해자도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선하게' 오해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과연 나는 내가 피해자라고 기억한 그 사건에서 정말 온전한 피해자였기만 한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만큼 아내에게 헌신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기억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는 결국 아내가 그토록 떠나고 싶던 유럽여행을 죽는 날까지 보내주지 못했다. 살고 있는 집은 처가의 도움으로 마련했지만 그 탓에 빚을 갚느라 여행을 보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불륜은 표독스러운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결과라고 믿는다.


스토너는 자신이 거의 아이를 키웠고, 어린아이와의 시간을 대부분 보냈다 믿었지만, 사실 갓난쟁이는 하루 종일 누군가가 지켜보고 먹여주고 씻겨주어야만 한다. 그는 수업이 있고 학과 일을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엄마와 딸이 함께한 총 시간이 자신과 딸이 함께한 시간보다 더 많았음에도, 자신이 보지 못한 시간 동안 딸은 방치되기만 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이런 믿음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디 한두 개뿐일까.


시선 비틀기를 즐기는 독자라면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스토너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던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응원하고, 비록 융통성이 없을지언정 학자로서 교수로서 그가 영문학이나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소신을 지켰으며, 정의와 동정을 구분할 줄 알았다. 비굴해지고 굽신거릴 바에야 무명을 택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고, 대상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있던 때이다.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 순간, 타인의 평가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었다. 얼마나 몰두했는가, 얼마나 충실했는가 하는 고양감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한 개인의 삶이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었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스토너가 영문학에 빠져들 때, 캐서린 드리스콜과 함께 공부하며 사랑할 때, 자신의 딸 그레이스와 함께 하던 조용한 평화의 시간에 그것들이 거기 있었다.


남들 보기에 멋있어 보이고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삶이라고 해서 가치가 있거나 없는 게 아니었고, 부유하고 안온한 삶이 가치가 있거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 존재의 내면의 의도까지 아는 자만이 가치의 있고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신이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자가 아니라면, 한 개인의 삶이 가치가 있었는지는 본인만이 알뿐이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이고, 살인 폭행 사기 절도 같은 비도덕적인 범죄를 하면서 개인적인 충만감이 넘치는 인간도 세상에는 있... 그자의 내면에서는 정말로 그런 행위를 가치 있다고 느낄까? 그것도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지?)



고1의 내게 삶은 혼란스럽고 난폭한 여정으로 보였다. 무엇이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 부모님들도 대접 잘 받고 밥벌이로 좋은 직업이니 교사를 했으면, 약사를 했으면 하고 바라는 정도의 이야기 밖에 해 주지 못했다.


내가 쓴 암울한 내 미래가 정말로 내 미래가 될 바에 콱 죽어버리고 싶었던 심정으로 쓴 글에, 선생님은 '네가 틀렸어. 그런 삶도 가치 있어.'라고 하셨고, 나는 본능적으로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논리적으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스토너를 읽은 지금, 나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남들이 그리 사니까 나도 따라서 사는 삶, 남들이 원하니까 나도 노력해서 가지려는 삶, 그래서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남들처럼 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생을 우습게 보았던 것은 현명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남들처럼 살기 위해 혹은 남들보다 좀 더 낫게 살려고 사람들이 그렇게 애를 쓰고, 그것에도 가치가 있다는 선생님의 말도 틀렸습니다. 그 삶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불행하고, 욕망이 이루어져도 그때만 잠시 만족스러울 뿐이에요. 죽음을 알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스스로의 탐욕과 불안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까요."



인생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은 스스로를 태워 빛나며, 그 빛으로 타인을 비출 수 있는 순간이고, 우리의 삶에서도 그러한 순간이 많을 때만 진정으로 그 삶은 의미 있고 가치 있다. 자신을 태울 줄 모르고 사는 삶은 그게 평범하건 비범하건 비극의 재료로 쓰이기만 할 테니까.


선생님이 교사로서의 자신을 조금이라도 태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거울만 보던 제자가 밉살스럽다고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대신, 그 아이에게 작고 빛나는 별을 건넬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녀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직업이 교사인 사람으로만 거기에 있었다.


나는 나의 미래가 선생님이나 여타의 어른들의 인생을 닮아가서 마침내 내가 쓴 작문 숙제처럼 되어버릴까 두려웠다.



내 글은 스스로에게 건 주문이 되었다.


혹여 어른이 되더라도, 오랫동안 잊고 살더라도, 어느 날 문득 교무실에 불려간 날이 기억나길, 그리하여 무시로 남들 따라 살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17살의 내게로 돌아오게 만드는 주문.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진정한 SF의 힘을 보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