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SF의 힘을 보여준

당신 인생의 이야기 - 테드

by 어제만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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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게는 연민을 자기 성격의 기본적인 일부로 간주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는 그 사실을 높이 평가했고, 감정이입이라는 점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와 맞부딪힌 기분이었다.



"내가 마음속 깊이 무조건적으로 믿고 있었던 무엇인가는 결국 진실이 아니었고,

그걸 증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칼은 르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자기도 정확하게 알며,

그 자신도 그녀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떼어놓는 종류의 감정이입이었고,

그녀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 영으로 나누면 중.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산산이 부서지게 되면, 그 세계를 바탕으로 사고하던 자아의 일부도 함께 무너진다.

'나'는 그 붕괴를 견디기 어렵지만,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더 이상 같을 수 없음을 안다.


르네도, 그녀의 남편도 그랬다.


천재 수학자였던 르네가, 자기가 알고 있던 수학적 세계가 완전히 허구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 시도에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을 때, 주인공인 나 또한 '나는 이런 일에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명제가 붕괴되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더 이상 아내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게 경악하지만, 그것은 이미 사실이 되어있고 바뀔 수가 없다.


괴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괴델 에셔 바흐>> 앞부분이랑 <<미학 오디세이>>에서 본 정도로만 이해하지만, 이 소재로 공감형과 논리형이라는 두 극단에 선 사람을 그 '영으로 나누면'은 과학을 몰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감탄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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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명백하게, 기가 막힐 정도로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

이 생각은 네가 나의 복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또다시 일깨워줄 거야. 너는 매일처럼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나 혼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존재는 결코 아니야.


내가 너를 들어 올려 한쪽 옆구리에 끼고 침대로 데려가는 동안 너는 계속 징징거리겠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나 자신의 고뇌에 관한 생각밖에는 없을 거야. 내가 자라서 나중에 부모가 되면 이치에 맞는 대답을 아이에게 해주자, 내 아이를 지적이고 독자적인 생각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해 주자, 하고 거듭 맹세했던 어린 시절의 내 결심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난 내 어머니와 똑같은 존재가 되려 하고 있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것에 저항할 수 있지만, 내가 이 길고 끔찍한 비탈길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되돌릴 수 없을 거야.


네가 성장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속도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할 거야.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움직이는 목표를 조준하는 것과 같아. 너는 언제나 내 예상보다 앞서 나가 있을 거야.


-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규정한다.

그러나 언어가 과연, 존재가 평생 인식해 왔던 세계관을 바꾸고, 잠재된 능력을 일깨울 만큼 엄청난 것일까?


작가는 그렇다고 말한다.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시간의 축 바깥에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의 여정들이 이미 예정된 궤적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죽음까지 받아들이기에 인간의 정신은 너무나 연약하지 않을까 싶지만, 발상도 전개도 탁월하다고 느꼈다.



컨택트라는 영화를 티브이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처음부터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에도 볼 때마다 재미있었다. 소설이 원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원작이 장편도 아니고, 단편 소설이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 단편들 작품 하나하나가 굉장한 압축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흔히 SF 소설의 꽃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정말 잘 쓴 SF 소설은 상상력이라는 소재로 기존에 우리가 이해하던 세계를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하고, 내가 알던 관념을 부수거나 확장시켜 준다.

테드 창이나, 가즈오 이시구로 같은 SF 소설은 애쉬톤이나 앤디 위어의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면서도 무게감까지 가지고 있어서 읽고 나면 오래 곱씹기 좋다.

꼭 읽어볼 만한 책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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