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뉴엘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의 제목을 읽어볼까요.
어떤가요?
어떠한 이야기가 그려지나요?
소설의 제목은 시에 못지않게 작품의 첫인상을 결정하며 때로는 작품을 읽는 것에 대한 여부를 결정합니다. 특히 저처럼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뭔가 마음에 끌린다는 이유로 책을 집어 읽는 독자는 더욱이 그러합니다.
원래가 팔랑귀이기도 하고, 스포일러를 극도로 혐오하기에 심할 때는 책 뒤편에 있는 비평가들의 한 줄평도 의도적으로 읽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한 평가에 휘둘려 저 자신만의 주관적인 감상을 만들어내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죠. 물론 제가 심한 편이기는 합니다만, 작품의 반전을 알고 있는 상태로 작품을 감상하면 재미가 반감된다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괜히 '안 본 눈 산다'라는 명언이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이 책 역시 제목만 보고 손을 뻗었습니다. 어디선가 이 책이 책장에 꽂혀있는 여자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긴 한데...
뭐 왜인지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독서를 시작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놀라운 감화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고, 직접 활자를 마주하고 부딪히고 구른 덕에 귀한 감상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간단한 감상을 풀어내 보겠습니다.
아, 참고로 밑의 내용부터는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니 저처럼 민감하신 분은 읽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음 처음부터 엄청난 스포를 하자면...
이 소설은 팜므파탈의 아리따운 여성이 연상되는 제목과는 달리 '퀴어 소설'로 일컬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옥에 갇힌 두 남자 죄수의 사랑과 가까운 우정을 다룬 이야기죠.
제목이 '거미여인의 키스'인 까닭은 한 죄수가 다른 죄수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영화의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첫 번째 죄수인 몰리나가 다른 죄수인 발렌틴에게 6개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책의 구성이 조금 독특한데, 이야기는 전하는 '서술자'가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냐고요?
'몰리나'와 '발렌틴'의 대화만으로, 그리고 가끔 등장하는 '보고서' 형식의 글만을 사용하여 소설을 전개해 나갑니다. 그래서 독자가 이들의 대화를 몰래 훔쳐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글에 현장감이 있습니다. 서술자가 자리를 비켜주니 등장인물에게 드는 내적 친밀감도 더 커지고요. 여러분이 독서를 마치고 나면 몰리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가 주된 내용입니다. 몰리나는 감옥에서 심심한 발렌틴에게 자신이 좋아했던 영화의 이야기를 매우 구체적인 부분까지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옷차림과 머리 장식, 장소 및 공간 묘사) 재구성하여 들려줍니다.
그러나 시각적인 매체였던 영화를 텍스트인 언어로 옮긴다면 당연히 변형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사람이 기억하는 바에 의해서 새롭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더욱이 그러할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몰리나'는 자신의 마음대로 보았던 영화를 재구성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강조하고,
조금 다르게 묘사하기도 하며 대중문화를 개인적인 상황에 맞게 풀어냅니다.
모든 이야기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 일부를 시사하며, 대중예술을 폄하하던 발렌틴이 솔직한 마음을 내비치며 몰리나에게 영화 이야기를 간청하도록 변하게 만듭니다.
독자는 일련의 과정을 함께 경험하고 같은 내용이라도 어떠한 매체나 형식을 사용하여 전달하는지에 따라 전달에 어떠한 차이를 부여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죠. 두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개괄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몰리나 : 동성애자. 37세.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 영화와 예술 선호. 감성적.
발렌틴 : 이성애자. 26세. 단식 투쟁에 참여한 정치범. 예술은 대중을 유혹하는 부산물이라 생각(마르크스주의). 이성적.
꽤나 상반되는데요, 위와 같이 판이한 사회에 속해 서로 다른 가치를 목표로 삼았던 두 인물은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평등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초반부터 둘은 대사를 바꾸어도 이질감이 들지 않을 만큼 수평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흥미롭게 대화를 경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도 공격적이지 않고 소신 있게 피력하며 대화를 전개해 나갑니다.
독자는 책을 읽다 몰리나가 사실은 발렌틴에게서 정보를 빼낼 스파이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몰리나의 이미지와 좀 다르거든요. 이렇게 작가는 역할을 한 번 비틀어 몰리나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그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하지만 그러한 권력을 가지면서도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빠져들어 큰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합니다. 이에 그는 일방적으로 착취당하고 희생되는 인물상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사랑을 하며 사랑을 위해 이야기를 재생산하는 예술가가 됩니다.
반면 발렌틴은 이념이라는 대의에서 소외되었던 자신의 욕망과 육체의 나약함을 인지하며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며 자아를 발견합니다. 너무나 달랐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스며들며 부족한 부분을 메꿔나갑니다.
참으로 이상적입니다.
인간관계의 절대다수는 수직적입니다. 관료제인 모든 공적 기관은 물론이고, 민영 기업, 개인 사업, 학교 등 수많은 곳에서 우리는 여러 기준을 통해 위와 아래를 첨예하게 구분합니다. 심지어 가장 평등해야 할 친구와 가족 사이에서도, 더욱이 연인 사이에서도. 수많은 관계들 사이에는 위계가 존재하고, 때로는 숨이 막힙니다.
그렇기에 위 소설을 읽으며 두 주인공의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계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끝내는 사랑하게 되는 관계의 진전은 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 외에 무엇을 더 원하겠습니까?
행복한 순간이 영원할 수는 없지만, 행복한 순간을 가졌다는 사실은 영원합니다.
발렌틴이 눈을 감고 꿈꾸는 순간 언제나 거기에는 거미로 변하지 않는 거미여인이 있고
그는 그에게 키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좋은 일이 일어나면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해.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p 369
덧 1, 해설에서 언급하였듯이, 푸익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간극을 좁혀 하나로 만드는 작가입니다.
그의 소설은 보편적인 독자, 대중의 공감을 받음직한 가독성을 가지면서도 형식과 내용 어느 것에서도 예술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과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책의 주제는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애초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덧 2, 소설의 구성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보면, 생각과 대화를 병렬적으로 서술한 부분도 있고 ex) 자 공부를 해볼까 (집에 가고 싶다) 이야기와 무관해 보이게 동성애에 대한 학문적인 고찰을 담은 긴 각주들이 늘어지는 등 독특한 방식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렇듯 실험적이고 상상을 자극하는 구성은 독자들이 '매체'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게 합니다.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작가의 연출에 대한 역량이 가감 없이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덧 3, 황지우 시인은 이 작품 영화판의 결말부를 제목의 시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감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심장에 박힌 총알은 순간, 퍼어런 별이 되고>
호모인 몰리나가 애인 발렌틴의 혁명 조직원에게 다가 가자마자
그를 미행했던 브라질 國家安全企劃部 요원들이 덮치고
도망치던 브라질 運動圈 택시가 다시 몰리나에게 다가와 총을 쏘고 달아나 버린다
목에 빨간 스카프를 한 몰리나, 그의 푸른 와이셔츠 포켓에 구멍이 뚫려 있다
가련한 나의 몰리나, 왼손으로 심장을 만지면서
한바탕 총격전으로 한적해진 광장을 천천히, 걸어간다
그의 얼굴에 고통은 없었다
다만, 심장을 찌르는, 쩌릿쩌릿한 회한 같은 것을 지그시 참고 있는
흐릿한 우울이 떠 있다
(중략)
뒤늦게 안기부 요원들이 꼬꾸라진 몰리나에게 달려와
총을 턱에 대고 외쳐댄다
그 전화번호를 대, 그러면 널 병원으로 데려가주겠어,
그 번호만 대, 넌 살수 있어, 대란 말야
몰리나, 흐린 눈으로 그들을 한번 쳐다보고는 눈을 감아버린다
안기부 요원들, 이 더러운 호모 새끼, 이 쓰레기 같은
인간! 침을 뱉고 몰리나를 길가 쓰레기장에 던져버리고
간다
몰리나는 오직 아름다워지고 싶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난 잘못 태어났단 말야, 알잖아, 넌 내가 지금 무얼 원
하는가, 그래, 내 다리를 더 위로 올려줘
쓰레기 같은 삶
쓰레기통에 버려진 美
주인공의 심장에 박힌 총알은 순간, 퍼어런 별이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