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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Oct 08. 2023

교사의 본업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교사의 본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한 해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현장에서 교과 교사의 본업은 수업과 학급운영이다. 

(학급운영을 담당하지 않는 비담임 교사라면 학생지도, 상담이 될 것이다.)


한 학급 37명.

주당 4차시 수업, 총 20시수.

담임.


주당 서로 다른 수업 네 개를 준비하고, 서로 다른 다섯 개의 학급에서 수업을 한다. 

한 차시 수업 준비는 교재 연구에서 시작된다.

교과서를 분석하고 외부 자료를 함께 사용할지, 단원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지 고민한다. 

도입 부분에서 사용할 동기 유발 자료로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교육적인 자료를 찾기 위해 상당 시간을 할애한다. 전개 단계에서 적용할 방법을 찾고 개별 또는 모둠 활동에 적합한 활동지를 만든다. 학습지에 기재되는 내용은 학생들이 공부할 때 사용하는 자료가 되기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단어 하나 차이로 학생들이 이해하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한 차시 수업은 학급 구성원이 다르기에 똑같이 운영되지는 않는다.

수업을 할 때마다 학급당 인원수가 수업의 질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임을 절감한다.  

글 쓰기 수업을 할 때 교사의 지도에 따라 학생들은 눈에 띄게 변한다. 첫 줄 쓰기를 막막해 하는 다수의 학생들 곁에서 개요를 함께 만들고, 앞에 두 줄만 같이 고민해 줘도 어느새 술술 써 내려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잘 쓰는 건 다음 일이다. 시작을 하지 못하면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일부 학생들만 간략히 지도해도 수업 시간은 끝난다. 

학급당 인원수가 많을수록 함께 갈 수 있는 학생들은 적어진다. 학생 수 감소로 자연스럽게 학급당 인원수 감축이 가능한 이 시기에, 교사수를 함께 감축한다니 답답하다. 


수행 평가 다음날 점수를 물어보는 학생들이 있다. 아마 학생들 대부분은 전날 선생님이 모든 수행물을 살펴 보았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맞다. 상식적인 생각이다. 

수업 외 시간은 학생들의 수행물을 꼼꼼하게 살펴 보고 피드백하는 데 써야 한다. 그러나 나는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한다. 


담임 교사로서 학급 운영을 한다. 각기 다른 학생들을 한 데 모아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서로 존중하는 교실을 만들어야 한다. 어렵지만 해내야 하는 일이기에 많은 힘이 든다. 학생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무르는 교실 한 켠이 안전하다고 느끼길 바란다. 

다양한 갈등으로 학급 분위기가 위태로워질 때, 지도의 말을 세심하게 계획해야 한다. 때로 말을 정리하다 밤을 지새우고 동료 교사와 기나긴 상담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럼 난 그래야 하는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본업 외 업무에 잠식되어 있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본업을 놓아서는 안되기에 늘 부당함과 힘에 부침을 느낀다. 스스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자문하기도 한다.  본업 외 업무의 양과 종류는 교사마다 편차가 크기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자유로운 교사는 없다. 

본업 외 교사의 업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 어렵지 않은 일들이 모여서 본업을 능가하는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수업과 학급운영에서 수년 간 멀어진 관리자들은 기타 업무를 잘 하는 것을 능력을 판단하는 척도로 삼기도 한다. 공문 처리를 잘하면 능력있는 교사로 인정한다. 


학교에서 ‘전문가 초청 특강’이라는 행사를 하나 치르기로 하자.

운영 계획서를 쓰고 날짜를 정하면 누군가가 나타나 처리해 주는 것이 아니다. 여러 날에 걸쳐 전화를 돌리며 강사를 섭외하고 일정을 조율한다. 출강원고 및 자료를 받는다. 가정통신문을 만들어 결재 받고 공지하고 신청 명단을 수합한다. 주차 공간을 알아보기도 한다. 

현수막을 제작하고, 간식을 주문한 뒤 강사료 등 예산 품의를 올린다. 학생 대상이라면 강사 범죄 전력 조회도 해야 한다. 시간 맞춰 간식 및 기타 준비물을 받고 개수별로 분류하여 놓는 일을 한다. 강연에 필요한 물품을 대여하고 장소 및 장비를 점검한다.  강당에 수십 개의 의자를 놓고, 수업 시간표를 조정한다. 공지를 못 본 사람들의 민원 전화, 수업 시간표가 바뀌어 항의하는 목소리 또한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사이사이 기한 내에 제출해야 하는 공문들은 계속 나타나고, 때때로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수합하고 제출해야 할 서류들은 끝이 없다. 이런 종류의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하기도 한다. 

매일 수업은 그 자리에 있다.  


방과후학교 수요 조사를 실시하고 수업을 개설한 적이 있다. 그런데 수요 조사 결과보다 많은 학생들이 한 수업을 원하였고, 신청한 학생들 중 일부가 선착순으로 탈락되었다.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업무 담당자로 앉아 신청 인원과 개설 수업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미흡함을 지적받았다. 친구 아들이 탈락하여 힘들어 했다는 원망의 말을 곁들어 들었을 때, ‘이런 책망을 들으면서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는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이것은 내 본업이 아니다. 미흡한 준비로 수업을 망친 것도 아니며, 고민없는 상담으로 학생들을 상처주지도 않았다. 본업 외 업무는 완벽할 수 없다. 

주어진 시간 내에 한정된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사람이다. 본업이 아닌 기타 업무에 힘을 쏟게 되면 본업이 무너진다. 숨가쁘게 수업에 들어가고, 업무 사이사이 수업은 얼른 해치워야 할 일이 되어 버린다. 


수업과 학급운영은 교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가장 많은 힘을 쏟아야 하는 일인데, 숨 쉬듯 해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교육 혁신을 명분으로 새로운 사업을 양산하지 않기를 바란다. 

해마다 새로 쏟아져 나오는 각기 다른 이름의 사업들은 예산과 함께 교사의 기타 업무가 되고, 운영 계획서와 현수막 문구로 남는다.  

교육 사업과 예산은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운용할 때 의미를 갖는다.

어려운 고전을 읽으며 혼자 의미를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 학생들을 모아 독서 동아리를 만들고 도서구입비, 간식비로 예산을 사용한다. 운영 계획서를 작성하고 모임 장소를 찾고, 책과 간식을 고르며 품의를 한다. 본업을 위한 잡무이지만 보람이 있다.  


본업과 잡무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끌어안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잡무가 본업을 넘어서 교사가 소모되는 일이 당연해지면 안된다.  

교사가 본업에 정성을 쏟을수록 그 가치는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모두를 위한 일이다. 


지역 별 교육편차로 과밀학급과 과소학급이 혼재하는 상황에서, 되는대로 학생들을 맞춰 넣고 교사수를 감축하며 수업 시수를 늘린 뒤 일단 감당해 보라고 해서는 안된다. 


일을 줄여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본업을 제대로 하게 해 달라는 말이다. 


어떻게 더 간단히 말할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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