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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Sep 24. 2023

세월호와 나의 이야기

신동엽 시인의 시 ‘산에 언덕에’와 엮어 읽는 자료로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보여 주다가, 아이들이 이 작품을 세월호 노래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시 진도를 멈추었다.


2014. 4. 16. 

그 때도 교사였던 나는 학교에서 가장 큰 본교무실 안 교감 선생님 왼편에 자리가 있었다. 그날따라 5분 정도 지각을 해 살짝 눈치를 보며 책상 위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평소 출근 준비를 하며 듣던 뉴스도 생략하고 허겁지겁 왔던 터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빙긋이 웃고 있는 교감 선생님의 사정도 알지 못했다.

시골 할아버지같이 구수한 말투와 성정의 교감 선생님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이 학교 교감 아주 그냥 똥줄 타것어.”라는 말씀과 함께 웃으셨다. 그 시간, 우리는 그렇게 웃을 수 있었다. 

한 고등학교, 수학여행지를 향해 떠난 배 한 척, 사고가 있었지만 모두 구조, 한 명도 빠짐없이 무사한 학생들. 큰 일이 날 뻔한 것과 나지 않은 것의 엄청난 차이 속에서 전화에 불이 나고 있을 한 고등학교의 교무실을 떠올리며, 우리 교감 선생님은 평화로운 당신네 학교를 고마워했다. 비 오는 날 따뜻한 실내에서 창 밖으로 바깥 사람들을 구경하는 딱 그만큼의 마음이었다.

오전 내내 수업을 하고 돌아온 교무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교감 선생님은 더 이상 웃지 않으셨고, 연이은 공문과 일과 끝에 퇴근 시간이 되었다. 교무실은 내내 침묵했다. 

당시 학교에서 20여 분 떨어진 오피스텔에 살고 있던 나는 그 추위를 기억한다. 바닥난방이 되지 않아 봄이 무색하게 늘 쌀쌀했던 집이었지만 그날은 정말 유난히도 추웠다. 수면양말을 끼워 신고 전기장판 온도를 올리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노트북만 노려 보았던 그날, 아무리 애를 써도 몸 속 깊이 한기가 박혀 떠나지 않았던 그 밤, 노트북에서는 끊임 없이 ‘수색, 생존자, 희망’이라는 단어가 들리고, 수색을 통해 생존자를 찾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져야 하는데 울컥 울음이 터졌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 내 몸이 너무 추워서, 이렇게 추운데 이 아이들은 바닷물 속에 있는 거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도 살아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를 악 물었다. 

알고 있는 것과 보고 있는 것의 괴리 속에서 한없이 무력해지고 도대체 왜 이들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머릿 속을 헤집으며 밤을 지샜다.

그 날 그렇게 아침을 맞이한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동안 피해지지도 떨쳐지지도 않아 직면하기로 했다. 닥치는 대로 출판된 책을 읽었고, 관련 ‘기록’ 속에는 뜨지 말아야 했던 배와 사고가 났더라도 다 구했어야 하는 승객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 명백해서 유족들은 세월호를 놓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맺음이 있어야 떠난 이를 기릴 수 있는 것이다. 놓아 준 이후에야 떠난 이가 ‘천 개의 바람’이 되었고, ‘산에 언덕에’ 마땅히 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해조차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맺을 수 있겠는가.


2023. 세월호가 막연한 어린 시절 기억인 아이들 앞에서 ‘노란 리본’을 말한다. 지금도 노란 리본이 종종 보이는데 그것은 함부로 폄하될 마음이 아니다. 우리가 아주 쉽고 간단하게, 아픔을 위로하는 방식이다. 지나가는 사람 중 유족이 있을 수 있고, 가방에 달랑거리는 작은 노란 리본을 보며 자신이 사랑했던 이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그 뿐이다. 또 우리가 리본을 오래 단다 한들 얼마나 달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 해 내외. 이후에는 애써 붙잡으려 해도 무심히 바라 보는 역사 속 사건으로 흘러 갈 것이다. 


2014. 세월호 참사 이후 한 사이트에 단원고 학생 교복을 입고 어묵을 먹는 사진이 올라왔다. 입에 담기 어려운 조롱과 이에 화답하는 댓글들. 세월호 참사 이전에도 반 아이들 중 일부가 재미로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세상에는 여러 생각이 있고 그 중에는 부정적인 것도 있기 마련이다. 지혜롭게 판단하자.’는 따위의 이야기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던 나는, 이후 단호하게 말하게 되었다. 이런 게시글도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생각’ 중 하나에 넣을 수는 없었다. 길지도 않은 소중한 우리 인생을, 이렇게 빛나는 너희들의 시간을 정말 이런 사람들 속에 앉아 보내야겠냐고 간곡히 호소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과 분향소를 찾아갔던 날, 떠난 아이들과 또래인 학생들을 보면 가족들이 더 마음 아프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문 앞에서 주저하고 있던 때였다. 분향소에서 한달음에 나와 아이들 손을 잡으며 이렇게 또래 아이들이 찾아오는 날이 가장 좋다고, 우리 아이는 떠났지만 대신해서 잘 지내주는 것 같아 정말 반갑고 고맙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던 어머니가 계셨다.


나에게 세월호 참사는 지금도 가늠할 수 없는 그 어머니의 마음이다. 좋은 마음 나누며 살기에도 짧은 세상에 부디 그렇게 살아 보자는 호소이며, 어렵지도 않은 ‘기억’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하는 아픔이다. 

매해 교과서 진도를 잠시 멈추고, 꼭 들려줘야 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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