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 사람이다. 말 그대로 키가 작다. 지금은 대한민국 성인 여자 평균 키를 살짝 밑돌지만 나보단 항상 컸던 언니는 어릴적 종종 키 작은 나를 놀리곤 했다. 꼬맹이! 땅꼬마!
그럼 나는 작은게 맞으므로 반박도 못하고 그저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어른의 기준으로 보면 작은 아이가 더 작은 아이를 놀리는 귀여운 광경일지 모르지만, 작은 나는 작은 게 세상에서 제일 초라하고 서러웠다.
그렇게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고 싶었던 남자가 있었다. 마음은 크지만 대체로 표현은 서툰 아빠란 존재다. 아빠는 땅이 아닌 하늘에서부터 키를 재면 언니보다 내가 더 크다며 위로했다.
하지만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한 하느님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의 키를 재자며 하늘 꼭대기에서부터 줄자를 들이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로 키가 거꾸로 뒤집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내 키는 작은 게 맞다.
키가 작아 옷감이 덜 필요함에도 길이를 자르고 줄이는데 드는 비용이 더 든다. 의자가 낮은 식탁이 편하고 옷장 옆에는 높은 데 걸린 옷을 꺼내기 위한 옷 봉을 둬야 한다. 작다는 건 종종 불편한 일이지만 살다보니 또 그럭저럭 익숙해 지긴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키가 갑자기 불쑥 큰 아이들이 겪는다는 성장통을 겪어본 일도 없다. 나는 항상 앞쪽에 섰고, 앞줄에 앉았다. 맨 뒷줄은 바라지도 않았고 중간쯤에만 앉아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름순으로 앉을 때조차 나는 앞줄이었다.
공교롭게도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곳도 소도시의 작은 마을이었다. 물론 그땐 내가 작은 도시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술래잡기를 하면 숨을 곳이 많았고 마을 어귀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대학때 처음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야 내가 작은 도시, 작은 마을에서 자랐음을 실감했다. 큰 도시, 서울에서 나는 많은 것이 변하길 바랐다. 좀 더 대범해지길 원했고 유능한 사람이 되길 원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 많은 돈을 벌고 싶기도 했다.
운명인 걸까. 난 크지 않은 규모의 직장에 들어와 작은 월급을 받고 있다. 분명한 건 지금의 내가 어릴적 내가 꿈꾸던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에도 지금의 내가 밉지는 않다. 햇살 좋은 주말에 빨래를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수건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내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두부어묵 찌개를 엄마를 조르지 않고 마음껏 끓여먹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대단하지 않은 순간에 문득 행복을 느끼고 작고 시시한 것 같은 일에도 감사함을 느끼는 내가 좋다.
그렇다고 매일 즐겁고 매순간 감사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거거익선이 진리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소소익선의 여유를 찾아보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