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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Apr 27. 2024

앞 날은 알 수 없고, 다만 흐르는물에 몸을 띄우듯이

귀국을 두 달 앞두고 누워 지내는 생활을 하며

  인생의 계획을 빼곡히 세우고 이를 실현하는데 성취감을 느끼던 시절이 길었다. 짧게는 매일 아침 그 날의 할일을 메모했고, 길게는 매 년의 계획을 세웠다. 1월 1일이면 새 일기장에 그 해의 목표를 적었다. 그냥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느날에는 지난 일기장을 읽다가 입사 초에 적어놓은 계획을 발견했다. 연도별로 언제 원하는 곳으로 파견을 가고 언제 승진 요건을 채워 승진을 하고, 언제 결혼을 하고, 언제 출산휴가를 쓰고, 언제 유학을 갈지 써 있는 그 메모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났다. 20대 중반의 나는 승진과 유학을 빠르게 달성하고 싶으면서도 결혼 계획도 있고, 아이를 낳을 계획도 있었나보다. 그 후 녹록치 않은 회사 생활에 정신 없이 바빠 몸과 마음이 지치면서 내게 그런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결혼하던 때에는 아이 낳을 생각일랑은 일절 없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조차 잊었다. 야무진 계획을 세웠던 나의 미래는 어떻게 현재가 되고 과거가 되었나? 원하는 곳으로의 파견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바쁘게 일하며 결혼을 하고, 결혼 이후 더 바쁘게 일하다가 겨우 겨우 승진을 하고 힘겹게 유학 기회를 잡았다. 파견과 승진, 결혼과 출산, 유학 중에서 승진과 결혼, 유학을 잡았으니 계획의 반은 이룬걸까? 지금의 내가 과거를 돌아보며 생각하는 것은,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그 순간의 내가 바라는 것을 정리해보는 것이고 살다보면 나의 마음도, 여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진심이었던 내 마음도 변한다는 것. 누구나 깨닫는 평범하고도 편안한 사실이다.


  그렇게도 일상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던 나는 요즈음 내 마음이 눈에 띄게 편해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지난 글에서도 썼듯이, 캐나다로 유학 나오면서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걱정보다 별 일 없이 살게 된다는 점, 오히려 좋은 일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사실 6월 귀국을 앞두고 봄이 찾아오는 4월부터는 내가 사랑했던 밴쿠버에서의 삶을 꼼꼼히 디디고 싶었다.  비가 그치고, 초록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나무가 가득한 밴쿠버에서의 일상을 떠나기 전 충분히 누리고 싶었다. 너른 바다에 눈 덮인 산이 펼쳐진 한산한 공원에 앉아 책을 읽고 산책하는 강아지를 구경하는 시간. 그릴과 아이스박스를 챙겨 바다와 잔디에 감탄하며 맛있는 고기를 구워먹는 행복감. 카약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딸기와 치즈와 허브가 들어간 산뜻한 샌드위치를 먹는 딥코브에서의 시간. 그랜빌 아일랜드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좋아하는 외국의 식재료를 사고 인생 도넛인 리즈도넛을 사서 바다 위를 떠다니는 수상 택시를 구경하며 먹는 달콤함. 고등학교 때 자전거를 타다 크게 다친 후 자전거를 못타게 된 내가 바닷가를 따라 도는 자전거도로를 돌고 싶어 용기 내서 자전거를 연습하게 되었던 스탠리파크에서의 자전거 구경, 빼곡한 침엽수로 둘러쌓여 다른 사이트의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 숲 속에서의 한적한 캠핑. 그런 것들을 한 번씩 다시 해보고 '아 무척이나 충분한 시간이었다-' 감탄하며 소중한 마음을 품은 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2,3월 심한 입덧으로 집에 쓰러져 있으면서 그런 4월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임신 안정기가 찾아오고 입덧이 차츰 잦아들고, 겨울 내내 비가 오던 밴쿠버의 하늘이 깨끗하게 맑아오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내 마음은 기대로 부풀었던 것 같다. 하지만 4월만을 기다리며 희망 찬 미래를 꿈꿨던 것과 달리 내 몸은 안정기를 만나지 못했다. 한 생명을 품고 키워내는 임신 기간에 진정한 안정기는 없다고도 하던데. 순탄하고 편안하게 임신 기간을 보내는 건 아주 운이 좋아야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보다. 응급실에 가고, 급하게 병원을 다니고, 마음 졸이며 누워서 지내야만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속상함에 울었다. 나는 곧 이 아름다운 밴쿠버의 삶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없는데. 하고 싶은게 많았는데.


  그런데 눈물은 짧았다. 잠깐 울고 나서 차분하게 생각했다. 뱃 속의 아기는 괜찮고,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지 않아도 되고, 커다란 논문과 발표는 이미 끝냈다. 그저 누워서 쉬면 된다. 밴쿠버의 아름다운 봄을 즐겁게 누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쉬움에 눈물을 흘려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예전엔 계획이 틀어지면 그 자체에 오래 오래 스트레스를 받았다. 불과 2년 전 밴쿠버에 왔을 때 집을 구하지 못해서 한달마다 캐리어를 들고 거처를 옮겨다닐 때 나는 자주 '울적하다'고 말했다. 어느날 남편이 그랬다. 우린 이렇게 좋은 밴쿠버에서 멋진 자연을 누리고, 캠핑도 하며 즐겁게 지내는데 왜 계속 울적해하는 것이냐고. 그거야-. 원랜 학교의 가성비 좋은 가족 기숙사에 바로 들어가서 정착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학교에서 기숙사 정책이 갑자기 바뀌게 되어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상황이 바뀌었는데 나는 더 편안하고 좋았을 과거의 계획에 미련을 두느라 자주 울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밴쿠버에서 즐거운 일상을 보내면서 말이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을 진심으로 느낀다. 누구도 앞 날은 알 수 없고, 나는 일어나는 일에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조금쯤 알 것 같다. 일어나기 전인 미래에 대한 계획이 헝클어진다고 해도,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기대와 다르게 펼쳐지는 상황에는 내 몸과 마음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사는 것. 그래서 나는 내가 품은 아기를 잘 지키고자 몇 주째 누워 지내고 있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모두 걷어올려 넓은 하늘을 보면서, 책을 10권쯤 읽으면서 말이다.


  내면을 가꾸며 차분하게 혼자 있는 삶을 이야기 하는 책들을 많이 읽고 있다. 은둔의 즐거움,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보통의 언어들. 관심 갖던 분야의 입문서들도 읽는다. 차를 시작합니다. 퇴근길 클래식 수업, 1일 1채소. 본래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던 내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서 더 단단하게 그 쪽 길로 가보려고 관련 책들도 읽는다. 생각 중독, 신경 끄기의 기술,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같은 것들이다.   


  그 덕분에 마음은 대체로 차분하다. 어쩌면 이 시간은 한국으로 돌아가 완전히 새로운 '아이가 있는 삶, 복직한  삶'에 지쳐 또 다시 괴로워질지도 모르는 내가 그 전에 더 단단해지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펼쳐지는 예상치 못했던 삶에  유연하게, 편안하게 몸을 맡길 수 있도록. 캐나다에서의 시간들을 잘 새겨서 한국에 돌아가서도 잘 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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