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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빛 Aug 01. 2022

스펙타클 인생

 비가 온다.


비가 오고 있음을 알게 된 건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의 해맑은 비명 덕분이었다. 듣기만 해도 평온해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자 곧바로 세찬 빗소리가 아파트 단지에 울려 퍼졌다. 그건 풀벌레의 노래가 조금씩 들리는 여린 소나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같이 휘몰아치는 바람마저 땅속에 파묻힐 것 같은, 굵고 매서운 형태의 장대비였다. 베란다 창문을 닫기 급급했던 주말 오후, 자비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여름이었다. 땀과 빗물로 흥건해진 판초우의의 격한 찌린내가 코끝을 자극하는 무더운 날씨였다. 병장으로 진급 후 고난했던 군생활이 지루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의 망루 안에서, 나는 전입 온 지 얼마 안 된 신병과 함께 초소 근무를 서고 있었다. 웃을 때마다 '싱글벙글'이란 의태어가 참 잘 어울렸던 그 친구는 하회탈마냥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게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그의 정보였다. 이미 여러 간부와 선임, 후임들에게 감정을 소비해왔던 나는 군인들을 상대하는데 여러모로 지쳐있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면 충분히 친해질 수야 있겠지만, 딱히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며칠 뒤에 있을 전역식에 쏠린 말년 병장에게 신병이 눈에 띌 리가 없었다. 그도 내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고 자신이 먼저 손을 내미는 짓은 하지 않았다.


"병장님은 뭐하다 오셨습니까?"


그랬던 녀석이 그날따라 심심했는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의 태도가 흥미로웠던 나는 안경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뿌옇게 흐린 시야로 신병의 얼굴을 훑어봤다.


"나? 다른 애들이랑 비슷해. 휴학하고 알바 좀 하다 왔지 뭐."


"아, 그렇습니까?"


신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시 지역인 무기고와 나를 번갈아봤다. 잠깐 사이에 마주친 녀석의 눈빛은, 자신한테도 똑같은 질문을 해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넌 뭐하다 왔어?"


내가 묻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본인의 전과기록(?)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늘이 맑았던 어느 봄날에 친구들이랑 드라이브를 하다가 차가 뒤집힐 정도로 큰 사고가 났다. 기겁한 내가 다친 사람이 없었냐고 묻자 상대 차주랑 싸워서 다친 놈은 있었지, 사고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나의 벙찐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녀석은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털어냈다. 새벽에 클럽을 갔는데 깡패랑 몸싸움을 벌이다 경찰에게 끌려갔다거나,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는 해안가에서 친구랑 주먹다짐을 했다는 등, 나로선 절대로 상상 못 할 일들을 녀석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심지어 입대 전 날에는 여자 세 명과 연속으로 잠자리를 가졌는데, 아무리 밝히는 사람이라도 할 짓이 못 된다고 치를 떨기도 했다. 처음엔 허세 부리는 건가 싶었지만, 당시 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쉼 없이 나불대는 녀석의 주둥아리를 보고 있자니, 우습게도 정말 본인의 경험담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와, 진짜 별 일을 다 겪어봤네. 파란만장한 인생이여."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그리고 착해 보이던 인상과 상반된 행적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기가 차서 고개를 흔들던 나의 반응에 뿌듯했는지, 신병은 이빨을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정말 스펙타클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 비쳤던 녀석의 표정은, 근무를 서는 내내 거슬렸던 판초우의의 격한 찌린내도 잊게 만들었다. 그때 알았다. 신병이 짓고 있던 싱글벙글은, 내가 알고 있는 싱글벙글과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스펙타클.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가 전역을 하고 오 년이 지난 뒤에도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신병의 반전된 이야기는, 집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걸로 족했던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줬다. 가끔씩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일들을 실제로 겪어본 사람이 존재하다니, 그의 얘기를 전부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인지 의심보다는 호기심이 강하게 든 것 같다. 그만큼 현실에서 얘기하는 스펙타클은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였다. 재미난 사건이나 특별한 경험이 없는 나의 인생은, 신병의 삶에 비하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스펙타클한 인생은 무엇일까? 전역을 하고 수년간 고민을 해왔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꼭 경험해야 하는 것일까? 술을 잔뜩 마시고 바닥과 키스하거나, 돈을 주고 미녀와 잠자리를 가져야만 하는 걸까? 또다시 남의 인생과 비교하게 되는 스스로에게 비참함이 들 무렵, 다른 사람들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문득 궁금해져서 온라인을 찾았다. 늘 그랬듯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조금 놀랐다. 장장 오십 페이지가 넘어갈 정도로 넘쳐나는 인생에 대한 가지각색의 질문과 답변들, 그 속에서 나는 내 마음을 뒤흔드는 유일한 답변을 찾아냈다. 


"당신이 스펙타클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스펙타클한 삶입니다."


보통 같으면 무심코 지나칠 인터넷 상의 말인데도, 뭔가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간단하고 멋진 답안을 왜 나는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만큼 나는  스스로를, 내 인생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고 있던 게 아닐까? 아니면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해서 괜한 열등감이 들었던 건 아닐까. 신병이 저지른 일들이 범죄나 다를 바 없는데도, 그를 부러워했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일 것이다. 정확히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경험과 감정, 대담한 성격으로 빚어진 결과물을 부러워했던 것이겠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다지만 모든 것은 본인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절대적인 답안이 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주말에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기는 이 순간이 스펙타클하다면, 그 또한 스펙타클한 것일 테지. 누구나 개성적이고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나보다 스펙타클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고, 굳이 비교해서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나는 나만의 길을 가고 있는 거니까. 그 사람이 겪지 못한 일들을 내가 겪을 수도 있는 거니까 말이다.


빗줄기가 약해졌다. 시야에서 사라졌던 풍경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색이 진해진 아스팔트와 아파트,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연꽃처럼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다. 판초우의의 찌린내가 아닌, 커피의 은은한 향이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저녁이다.


오늘은 어째선지 

기분 좋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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