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의 영광(더 늦기 전에)
내가 태어난 곳, "경남 사천군 방지리 456번지" 이제는 호적부 속에서나 존재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농공단지 조성으로 땅이 완전히 변해버린 이미 20년도 더 지났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난지 1년이 채 안되어 가족을 따라 부산으로 갔다. 그래서, 나는 고향을 부산이라고 하고, 사천을 시골로만 기억한다.
중학교에 가기 전, 매 여름마다 시골을 잦아 꽤 오랜 시간 머물다 온 기억이 있는데, 그렇게 뚜렷한 것은 아니고, 탁한 창을 통해 바깥을 보는 것처럼 기억의 음영만 남아있는 정도라고 할까? 그중 어떤 기억은 비교적 뚜렷하다.
푸른 하늘, 뜨거운 태양 내리쬐는 한 낮. 아버지는 한 손에 삽을 이고, 다른 한 손에는 빨간색 고무대야를 끼고, 집을 나섰다. 돌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5분 정도 가면 동네 방아간이 았는데, 그 방앗간에 이르지 앉아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그 당시 시골집으로는 상당히 번듯했던 양옥집이 나왔고, 그 집을 지나가면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리 할어버지 소유의 논이 있었다. 그곳을 조금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논두렁을 몇 개 지나면, 사천만 뻘밭에 이르렀다.
뻘밭 중간쯤 들어섰을 때였나? 아버지는 삽으로 뻘을 파기 시작했다. 꽤 깊이 파냈다. 한 곳만 판 것은 아니고, 이곳저곳을 파냈다. 뻘 속 곳곳에 숨어있던 맛조개들이 고구마가 줄기에 달려서 뽑혀 나오는 것 마냥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렇게 세상과 마주한 맛조개들을 다라이 안으로 진흙도 털지 않은 채 집어넣었다.
노동의 대가는 정직했다. 수고한 만큼 다라이는 맛조개로 채워져 가고 있었고, 두어 시간 후에는 더 이상 삽질을 하지 않아도 돨 정도로 다라이는 가득 찼다.
삽과 맛조개로 가득 찬 다라이를 어떻게 옮겼는지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 버렸다. 다시 돌아갈 길이 1킬로미터는 되었기에 수확한 조개를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경운기의 힘을 빌었던지, 아버지가 직접 옮겼던지, 함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나와 형들이 옮겼든지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땀 흘려 수확한 맛조개는 작은할머니의 손길을 거쳐 그날 저녁 맛조개미역국으로 올라왔다.
나짱에서 해산물 식당을 간다면, 그냥 모닝글로리볶음 말고, 맛조개 모닝글로리 볶음을 먹어야 한다. 맛조개의 탄력과 탱탱함은 다른 어떤 고가의 식재료하고도 견줄만한 독특한 맛과 특색있다. 가격은 다른 어떤 메뉴보다도 저렴할 것이니 걱정 마시라.
마트나 시장에서 파는 맛조개를 사서 쪄서 먹기만 해도 맛이 있다. 그런데, 식당에서와는 달리 모래가 약간 씹히는 게 불만족이기는 하다. 독자 중 맛조개 모래 없애는 법에 대해 조언해 주실 분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