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도 알아야 할 나짱이야기 11

나짱의 4월 2일.

by 나짱임


미국은 남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남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는 두려움. 이른바, 도미노효과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미국은 1964년 8월 베트남 북부 통킹만에서 미국의 군함이 공격받았다는 확실하지 보고(이릌바 통킹만 사건)를 구실로 북베트남과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가나기5)


미국은 압도적인 전력을 쏟아부었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위해 싸워주었지만, 남베트남은 미국 정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베트남 군인에게는 목숨을 걸고 싸울만한 동기라고 할 만한 것들도 없었다. 베트남공화국은 국민의 열망이나 지지가 아니라 미국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는 전쟁 중임에도 쿠데타로 인한 정권교체가 잦았고, 부정부패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이었다. 미국은 남베트남 병사들이 주도적으로 전쟁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지만 남베트남군을 전쟁의 주역으로 세우기 위한 시도는 모두 실패한다.


결국 미국에 의해 시작된 베트남전은 미국에 의해서 끝나게 된다. 북베트남과 남부 인민혁명정부(베트콩) 아직 남베트남에 있었지만, 1973년 3월 23일 마지막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미국은 철수하면서 '파리평화협정'(베트남 전쟁의 종전 및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을 남겨놓고 갔다. 협정에는 '남북 베트남 간 협의, '외부의 간섭 없이', '평화적 수단'이라는 각양 좋은 말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구속력이 없는 협정은 종이쪼가리에 불가했다. 미군이 지원하지 않는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저항할 힘이 없었고, 북베트남의 남침에 의한 통일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북베트남이 미군 철수 후 가까운 시일 내 남침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북베트남은 미국이 다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할 때까지 기다렸다.


1975년 베트남전 전황도


2년 후 1975년 1월 인민군은 호찌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으로 비밀리에 이동한 후, 3월 10일 남베트남 북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첫 전투에서 남베트남은 항전에 의지를 보여주지 못한 채 패퇴하였고, 두 번째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중부 고원지방의 닥락과 플레이쿠는 북베트남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후 남베트남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었다. 군령이 서지 않고, 탈영병이 속출하는 등 통제불능이었다. 북베트남은 통일전쟁에 2년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전쟁을 2개월 이내에 끝내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3월 30일 후에와 다낭, 4월 2일에는 나짱, 4월 3일은 깜란. 하루에 수십 킬로씩 어떤 날은 100KM 넘게 남쪽을 향해 진격해 나간 것이다.


나짱을 점령한 후, 불과 5일 만에 다시 300 킬로미터를 진격해서, 사이공 60 킬로미터 부근까지 접근했고, 이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2주간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쑤언록 전투)


사이공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2주의 기간을 벌어준 것이다.


그 결과 그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티에우는 돈을 들고 대만으로 튈 수 있었다. 미군에 부역하거나 혁명정부에 적대적이던 인사들의 목숨을 건 탈출도 시작되었다. 4월 말로 접어들면서 사이공 함락이 임박해지자 미군은 헬리콥터로 미군에 협조했던 남베트남인, 미국인과 대한민국을 포함한 동맹국의 국민들을 탈출시키기 시작했다.


북베트남이 남쪽으로 진격을 개시한지, 불과 3개월 만인 1975년 4월 30일 오전 11시 30분, 인민군 탱크는 사이공의 대통령군 철문은 부수고 들어가 남베트남 마지막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아냈다. 대통령궁에는 임시혁명정부의 깃발을 게양되었다.

인민군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궁(현 통일궁) 철문을 쓰러뜨리며, 진입하고 있다.


나짱의 4월 2일은 '나짱의 인민들을 해방한 날'이라고 승자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번화한 해변가에 위치한 4월 2일 광장은 저녁이 되면,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놀이공간, 휴식공간으로 변한다.
포나가르 사원 앞을 지나는 길이름도 '4월 2일' 이다.






남베트남 노병 이야기



나짱 테니스장에 80세는 되어 보이는 노인이 볼보이를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테니스에 대한 열정만큼은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 볼보이의 역할을 하면서도 간간히 테니스를 치기도 했으니까. 나는 노인에게 테니스를 함께 쳐보자고 제안했고, 신고 있던 샌들을 벗고는 테니스화로 갈아 신고, 함께 게임을 했다, 세월이 흘러 몸이 둔해지고,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정확한 라켓 컨트롤로 봤을 때 그 구력만은 짐작할 수 있을 법했다.


운동 후,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데 80세 된 노인의 영어가 꽤나 유창했다.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대화가 진행되다 보니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베트남공화국의 장교였으며, 테니스도 그때부터 해왔고, 영어를 하는 이유도 미군과 통역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테니스를 잘 치는 이유가 있었다. 남베트남 패전이 확실해질 무렵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탈출했지만, 그는 그때 군인이었던 그는 탈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언제인지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그의 가족들은 지금 호주로 이주하여서 살고 있다고 한다.


패전국 장교의 삶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패전 이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군인들에 대해 이른바 재사회화를 실시했다. 노인도 약 6개월간의 재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차례 폭행과 고문 비슷한 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한 것을 목격했다.


재사회화 이후에도 사회가 패전국의 병사가 발 붙일 곳은 없었나 보다. 영어를 잘하는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따라서, 돈을 벌 수도 제대로 생활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떻게 테니스를 좋아하다 보니 테니스장에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면서, 소일하고 삶을 꾸려 나간 것 깉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나고, 남과 북이 모두 박항서, 김상식의 팬임을 자처하고, 축구대회 승리의 기쁨에 아이러브코리아를 외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처, 그리고 서로 간 남아있는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감정의 골은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사람들의 생김새, 억양, 생활습관과 더불어 베트남의 남과 북의 차이를 나누고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사이공을 탈출하기 위해 주 사이공 미국대사관 옥상에서 헬리곱터에 탑승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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