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까이강을 따라 흐르고.....
포나가르 사원 옆을 흐르는 강의 이름은 까이강이다. 포나가르는 1500년이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까이강은 더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인간들의 역사를 지켜보며, 있었을 것이다. 까이강 하류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간 어디쯤에 갈대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참족은 이 지역을 갈대가 많은 강, 그들의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면, "아이야 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베트남 사람들도 굳이 그 이름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부른 결과, 옛 참인들이 이 지역을 부르던 이름은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1400년대 레왕조 탄똥과의 일전에서 패함으로 참파의 소멸은 가속화된다.(가나기 2) 이제 남은 참족은 영토는 나짱과 판랑 밖에 없다. 반대로, 후에, 다낭, 뀌년에 걸쳐 남북으로 400 킬로미터에 이르는 영토는 이제 베트남 땅이 되었다.
다윗왕 이후, 솔로몬에서 정점을 찍은 유대왕국이 천천히 해체를 향해 나아간 것처럼, 레왕조도 탄똥의 시대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찍고, 아들까지 왕조의 위엄을 과시하였지만, 이후는 레왕조도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왕조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신하들에게 권력이 완전히 넘어간 것이다. 그 과정은 아래와 같다.
신하가 제위를 찬탈하여, 막씨의 왕조가 들어섰으나, 오래지 않아 레왕조 부흥을 외치는 자들에 의해 제압되고, 중국 접경의 산악지대로 밀려난다. 이 레왕조 부흥을 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윙씨와, 그 사돈 가문인 찐씨였다. 이제 레씨는 명목상 왕으로 존재하였고, 베트남 영토는 남과 북을 나누어 찐씨정권과 윙정권이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윙낌이 사망하고, 윙낌은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그 사위인 찐끼엠에게 이양되었다.(베트남은 여성에게도 동등하게 상속권이 있었다고 한다.) 찐끼엠이 왕도를 다스리게 되고, 윙정권은 남쪽으로 밀려나게 된다.(1558년) 이후 왕조는 명목만 유지한 채 사실상 북쪽에서는 찐씨, 남쪽에서는 윙씨에 의해 통치를 받는다. 윙정권의 영토는 냐짱 100 킬로미터 북쪽의 뀌년부근까지였다.
초기 북의 찐씨의 세력이 우세할 때, 1627년부터 1673년까지 50여 년에 걸쳐 수차례 남쪽을 공략했지만, 윙씨는 동서로 넓지 않은 국경을 이용하여, 찐씨의 공격을 막아낼 뿐 아니라. 남쪽으로는 참파를 공략하여, 베트남의 영토를 계속 확장시키다. 전쟁 이후, 남과 북은 레왕조 깃발아래 있었지만, 분단의 상태는 더욱 공고해졌다.
레왕조 권력의 모든 기반 및 농업생산력이 하노이를 포함한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한동안 세력의 유지가 가능하였으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베트남 북부는 바다와 중국과 쯔엉선산맥으로 막혀 있었던 데다, 이제 남쪽마저 윙씨가 가로막고 있으니, 세력확장이 길이 차단되어 버렸고, 찐씨정권의 성장은 정체되었다.
남쪽으로 밀려난 윙씨정권의 땅은 동서로 좁게 걸쳐있는 영토로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많지 않아 식량 자급이 어려웠다. 그래서, 부족한 농업생산력으로 인해 바다를 이용한 해외 무역으로 일찌감치 눈을 돌렸다. 나짱과 호이안에서 무역이 활발했던 것이다. 특히, 16세기부터 호이안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 간 중개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중개무역? 거리상으로 봐도, 일본과 중국이 베트남보다 더 가까운데, 왜 굳이 더 먼 호이안까지 와서 중개무역을 했을까? 요새말로 하면 택갈이를 하기 위해서이다. 명나라에서 조공무역외 민간무역을 금지했다. 명나라의 물품은 호이안으로 와서 베트남제로 택갈이 해서 해외에 판매되게 되었고, 그곳에서 중국 국내로 수입되는 물품의 거래도 이루어졌다. 명에서는 밀무역 방지를 위해 이러한 우회로는 허용하였다.
이렇게 해외무역으로 힘을 축적한 윙정권은 다시금 슬그머니 남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동안 잠자고 있던 남진본능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오히려 먼저 도발을 한쪽은 참파였다. 어쩔 수 없었다. 베트남에 주도권을 뺏기고, 소국이 되었지만, 윙씨는 접경지역의 경비를 점점 강화하고 있었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당할 것이다. 1611년 참파는 베트남의 남단을 침범했다. 윙호앙은 반격했고, 원점을 넘어서, 더 남쪽으로 내려와 푸엔을 점령했다. 이제, 한번 점령한 땅에서 물러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윙씨는 점령지를 유지할 체력이 넘쳤고, 참파는 이를 회복할 힘이 없었다. 푸옌은 나짱에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1653년 윙씨는 3,000명의 군대로 참파를 공격했고, 참파의 마지막 땅인 판랑까지 이르렀다. 이제 속수무책이다. 방법이 없었던 참파는 항복한다. 그래도, 끝은 아니었다. 윙씨의 진격은 판랑강 서쪽으로 넘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더 이상 판랑에도 머물 수 없었던, 참파는 그들의 마지막 영토 판리로 다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현재의 칸화성 지역이 베트남의 영토에 속하게 되며, 아이야짱은 나짱으로 도시 명칭이 바뀌게 된다.
윙씨는 지금 당장 참파를 소멸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조금 남은 그들의 영토는 대부분 모래밭으로 그렇게 탐나는 땅도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참파를 넘어 지금의 호찌민 지역으로 옮겨갔다. 메콩강은 오늘날 베트남 쌀생산의 절반을 감당하고 있을 정도로 북쪽의 주요 경작지인 홍강 삼각주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넓은 경작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1610년경 북쪽 찐씨정권, 서쪽 태국과 각각 분쟁 중이었던 윙씨정권과 캄보디아는 서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 같다. 윙씨의 응옥반 공주가 캄보디아 왕자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윙씨는 1622년 침입한 태국군대와 싸워 캄보디아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이를 계기로 윙씨정권은 참파접경의 캄보디아 땅인 프레이노코르(현, 호찌민시티)에 세관을 설치하여 5년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다.
1658년 캄보디아 왕과 사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그 사촌으로부터 도와줄 것을 요청받는 윙씨는 3000명을 이끌고 가서, 캄보디아왕을 붙잡았고, 그 사촌은 윙씨의 도움으로 캄보디아 왕이 되었다. 그렇지만, 베트남의 침략의도를 의심한 왕은 캄보디아 내에 거주하고 있는 베트남인을 살해하는 등 박해하였다.
그 이후에도 캄보디아에서는 왕위다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고, 싸움이 격화되자 한쪽 편은 태국 다른 편은 윙정권에 도움을 요청한다. 윙씨는 1674년 캄보디아로 군사를 보냈고, 캄보디아는 동서를 나누어 태국군과 윙씨 군대가 각각 장기간 진주하게 된다. 이때부터 프레이노코르(호찌민시)에 대한 윙씨의 지배력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한다.
1679년에 명나라 장수 양언적과 진상천이 군사 3,000명을 끌고 윙씨정권에 의탁한다. 윙씨는 그들을 프레이노코르 인근에 정착하게 하고, 농지를 개척하고, 지역의 관리를 맡긴다. 이후 호찌민 인근에 대한 윙씨의 지배권이 강해지고, 캄보디아가 권력싸움으로 인해 수차례 윙씨의 군사들이 캄보디아에 개입한 이후, 메콩강 하류의 지배권은 1698년 이후 윙씨로 넘어온다.
메콩강 서쪽의 영토가 베트남으로 넘어온 과정도 흥미롭다. 명나라 유민은 베트남뿐 아니라 캄보디아로도 넘어왔다. 막구는 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1671년 캄보디아로 이주했다. 캄보디아 왕은 막구에게 현 베트남 남서쪽 끝 하띠엔( 푸꾸옥 섬을 마주하는 도시이다.)의 관리를 맡겼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왕권이 약해지고, 태국의 잦은 침입을 받는 등 하띠엔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면서, 1710년 윙씨정권에게 보호를 요청하게 되어, 베트남으로 지배권이 넘어오게 된다.
변방으로 밀려난 윙씨정권은 오히려 이를 계기로 영토를 확장한 끝에 하띠엔을 병합함으로 인도차이나반도의 남서부까지 진출하게 되고, 베트남 영토의 남진을 완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