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의 나라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근현대사에서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18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외국의 침탈로 두 나라는 1900년대 첫 반세기를 각기 일본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지냈다. 식민지의 잔혹한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저항했고, 세계 2차대전이 끝나자 두 나라 모두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독립 이후 베트남인들은 스스로의 군대를 앞세워, 수도를 점령했고, 그 기세로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인들은 진정한 독립과 통일을 이루기까지 강대국인 프랑스, 미국과 전쟁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백만의 베트남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해방과 함께 미국과 소련에 군정이 들어서긴 했지만, 1948년에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각자의 나라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초반, 두 나라는 비슷한 시기에 열강의 대리전 성격의 내전인 한국전쟁과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겪게 되었고, 두 전쟁의 마무리 협상은 제네바 협정에서 함께 다루어지게 된다. 이제 열강의 식민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로 대결을 시작했고, 그 두 세력의 대립으로 냉전체제가 본격화되었다. 제네바 협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한 미국과 소련은 체제의 균형을 맞출 목적으로 베트남과 우리나라의 중간에 경계를 만들어 남북으로 나누어 버린다.
전쟁 이후 두 나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한반도는 남과 북의 체제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진 후, 각기 이념에 따라 남북간의 큰 분쟁 없이 각기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베트남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나라와 같이 남북으로 다시 나누어진 것은 같았지만, 베트남의 사정은 조금 더 복잡했다. 호찌민이 주도하는 월맹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수도로 진격하여, 베트남 전역을 점령한 바 있었고, 프랑스와의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도 사실상 승리했다. 국부와도 같은 호찌민은 공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민족주의자를 비롯해 식민지에 저항하는 세력이 모두 힘을 합해서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북쪽의 호찌민 정부에 우호적인 세력은 남베트남에도 존재했다. 농어촌, 밀림 지역에서는 임시혁명정부 세력(공산당 및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로 민심도 혁명 세력에 점차 기울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북베트남을 제압하고 남베트남을 지켜 주지 않으면,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되고 말 것이라고 염려했다.
이렇게 각자의 길을 가던 한국과 베트남은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시작으로 충돌하게 된다. 동맹국인 미국의 요청을 받아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군도 베트남전(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1966년 처음 참전한 한국군은 1973년 완전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32만 명 이상을 파병했고,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1,232명에 이르는 많은 한국인의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이 전쟁으로 남과 북의 베트남인은 300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항상 따라붙는 말처럼 그 중에는 민간인의 사망도 엄청났다. 결국,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민간인이었다.
베트남과 미국이 지켜 주는 남베트남과의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북베트남이 승리했고, 베트남은 공산화 통일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전쟁에서 패한 편에 속했지만, 군인들의 참전으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한편, 베트남전 소요 물품의 공급을 통해,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베트남은 전쟁에 승리했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제가 폭삭 망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전쟁 이후에도 베트남은 중국, 캄보디아와 전쟁을 이어 갔고, 캄보디아 점령 이후 다시 철수하기까지 10년간 엄청난 캄보디아 주둔비용도 부담해야 했다. 그리고, 냉전체제 하에서 공산권 국가와 교류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제조업과 금융업에서 발전이 뒤처지고, 자본주의 국가와 소득 격차는 더 커졌다, 1991년에는 절대빈곤율이 58%에 달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더 이상 전쟁의 승리에 취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베트남의 정치인들은 1986년 도이머이 Đổi mới를 선포한다. 도이머이는 베트남말로 ‘새롭게 바꾼다.’라는 의미다. 이 말은 전후 10여 년간 공산주의 경제 체제가(체제의) 실패를 의미함과 동시에 그와 반대의 길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이머이 정책은 생산 효율성 제고, 외국자본 유치, 국제경제 편입, 시장경제 도입,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경제정책 수립을 5대 원칙으로 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있었고, 18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국민의 소득수준이 개발도상국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자신감이 넘쳐났고,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도 뜨거웠다.
이 시점을 계기로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던 두 나라의 관계는 갑자기 가까워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서울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삼성과 LG를 필두로 한 우리나라 기업이 도이머이로 체제 전환을 선택한 베트남에 진출하기 시작하고, 4년 뒤인 1992년 12월 22일 대한민국과 베트남은 공식 수교 관계를 맺었다. 3일 후인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김포공항과 호찌민 떤선녓 공항을 잇는 대한항공 정기편도 개설되었다. 문화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하는데,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우리나라의 인기 배우이자 원조 한류 스타로 불리는 장동건이 호찌민을 방문했을 때, 이를 환영하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나왔다는 기사를 TV를 통해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현재, 민간기업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우리나라 해외 원조의 가장 큰 비중이 베트남을 향하고 있어, 두 나라가 경제적으로 이미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1990년대부터는 두 국가 간의 혼인을 통한 인적 교류도 증가하기 시작해서,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의 결혼을 통한 다문화가정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2024년도 한 해에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의 혼인으로 1만 5천 이상의 새 가족이 탄생했다고 한다.(*5천 건?) 이상 성사되었다고 한다. 여전히 베트남은 한국인과 가장 많이 결혼하는 나라이다. 경제적으로 가까워진 것과 더불어 혼맥으로도 두 나라는 더 가까운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베트남인의 한국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전에 없었던 수준으로 높아졌다. LG, 삼성, 효성, 두산, HD현대 등 한국의 대기업은 베트남 내에서도 수많은 양질의 고소득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아마도 베트남인들은 과거 중국을 끊임없이 모방하며 발전했던 것처럼 그 기술과 경험을 일정 부분 이전받으면서, 이전받지 못하는 것들은 곁눈이라도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베트남 제조업의 수준을 끌어올릴 기반을 착실히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음악, 영상 콘텐츠, 식품 등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문화 컨텐츠와 ‘박항서 매직’으로 통하는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의 선전은 두 나라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데 이바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5년 8월 국무회의에서 베트남과의 관계에 대해 ‘경기도 다낭시’, ‘사돈의 나라’로 표현하면서, 두 나라 간 활발한 인적 교류와 친밀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베트남 근로자에 대한 인센티브 부여를 검토할 것을 지시하고, 양국 간의 교류를 기술, 관광 및 문화산업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 베트남 정부의 적극적인 국외 자본, 기술유치에 대한 의지와 우리 기업들의 베트남 투자로 인해 향후에도 두 나라의 관계는 가일층 밀착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