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과 인생후르츠

뭣이 중헌가

by 정구

처음엔 집중하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 아~ 이래서 김훈작가 구나 싶었다. 그 겨울의 하얗게 날 선 추위와 적막 속 두려움, 속절없는 죽음들,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고 지났을 시간의 흐름까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작가가 기자출신이어선지 문장이 간결하고 중립적인 대신 독자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만큼 풍부한 세계를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조선은 전쟁에서 패한 후에도 그것을 오랑캐가 일으킨 난으로 규정했나 보다.) 당시의 이야기지만 낯설지 않은 인간군상이 나온다. 인정 많지만 무력한 왕, 도덕적 명분론에 빠져 목소리를 높이지만 자신의 삶은 일치시키지 못하는 풋지식인들, 약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신의 안위를 지킨 자들, 조선의 노비로 태어나 사람취급 못 받았지만 청의 통역사가 되어 나타나 복수를 하는 정명수?, 목숨을 버려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들과 김상헌, 살던 자리로 돌아가고자 했을 뿐인데 풀처럼 스러져야 했던 사공, 배신자의 낙인을 겁내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한 최명길, 밭에 뿌릴 똥물을 익혀 농사를 짓고 쇠를 두드려 조총을 고치고 적의 눈을 피해 왕의 격서를 전한 서날쇠. 김상헌은 서날쇠에게 격서를 부탁하며, 적에게 강 위의 길을 알릴까 두려워 죽인 사공을 생각한다.


어제는 인생후르츠라는 일본다큐영화?를 봤다.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다른 장르다) 유쾌한 인상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가 나오는데 아흔을 바라보지만 소년과 소녀처럼 고왔다. 할아버지는 건축가로서의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사는 곳, 사는 방식을 일치시켜 온 당신의 삶처럼, 밭을 돌본 후 낮잠을 주무시는 중 가만히 돌아가셨다. 15평 나무집을 짓고, 신도시가 생기며 사라져 버린 산 대신 당신의 정원에 숲을 만들고 정원의 낙엽으로 밭의 거름을 만들고, 예쁜 노란색으로 농작물의 팻말을 만들고, 할머니가 장 봐와 만들어 주신 음식을 드신 후엔 그림을 그린 엽서를 보내 판매한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에게 "이거 이렇게 할까요?"물으면 항상 "좋은 일이니 하세요."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점점 묻지 않고 혼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셨다고. 존중. 사람에 대한, 자연에 대한 존중으로 소박하지만 품위 있는 삶을 지켜낸 노부부. 아흔 살 할아버지의 감성적인 일러스트들은 덤이다. 남한산성에 대한 감상을 적으며 인생후르츠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다. 삶을 존중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답이 되지 않을까.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


(인생후르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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