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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크 Feb 06. 2023

당신을 위한 케이크

Ep4

나의 부모님은 크리스마스에 결혼을 하셨다.


수 십 년 전 그날은 눈이 펑펑 흩날리던 그야말로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불자도, 기독교 신자도, 천주교도도 아닌 부모님은 신혼여행으로 구례에 있는 화엄사를 택했다. 발 한번 내딛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던 그날 인적 없는 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부모님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동서양의 이 오묘한 조합이 어떻게 성사된 것인지 궁금해하곤 했다.


여하튼 크리스마스를 결혼기념일로 둔 부모님 덕에 나는 어렸을 적부터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전 날 밤이 되면 으레 떨리는 마음으로 양말을 거실 곳곳에 걸어놓고 잠들어 놓는 게 국룰이거늘. 내게 크리스마스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에 관한 내 유년시절의 기억 중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일은 언니들과 함께 누군가의 마당 혹은 길가 혹은 학교 운동장 혹은 어딘가에서 몰래 나무를 뽑은 뒤 집으로 가져와 부모님을 위한 트리를 만든 일이다. 어쩌면 합법적으로 가게에서 샀을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이 왜곡됐을 지도. (수습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우리 네 자매가 점점 커가고 독립을 하게 되면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도 뒤로 미뤄두고 집으로 달려가는 날이었다. 여느 때였으면 이브 날부터 집으로 갔을 터였지만 올해는 달랐다. 통장 잔고가 그야말로 맨몸을 드러낸 채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심부름 어플을 켰다. 마침 집 근처에서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어린양을 포착했고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배달해 주세요.'


오늘 나의 미션은 코로나에 걸린 뒤 격리 중인 그녀의 집으로 케이크를 배달하는 일.

막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는데 아침부터 꿀렁대던 잿빛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타이밍 실화냐? 하필 케이크를 픽업하는 장소가 언덕 많고 가파르기로 동네방네 소문난 성북동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네이버 지도로 확인한 찰나였다. 어차피 시급 만원인데 크리스마스이브 날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현타가 몰려왔다. 심부름 취소 버튼을 누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랬다가는 신뢰도가 깎이고 만다. 지금 당장의 편의를 보기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법! 나의 미련한 선택에 대한 대가이니 그 역시 오롯이 감내할 수 밖에.


골목을 어찌나 굽이 굽이 휘돌아 가는지 이러다가 버스가 뒤집히는 건 아닌지 싶어 몇 번이나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힘들게 정류장에 내려서도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 없고 차가 다니는 길만 있는 이 동네에서 갓길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인 채 오들오들 떨며 올라가는 길.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이런 데 있어도 되는 건가 싶은 곳에 있는 카페에 겨우 도착했다.


'그냥 케이크를 안 먹으면 안 되겠니...'

'코로나 걸려서 몸도 안 좋을텐데 꼭 차가운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거니...'

잔뜩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나를 고용한 그녀에게 닿을 턱이 없는 말들을 생각했다.


"케이크 찾으러 오셨지요?"

험상궂은 얼굴로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니 말 그대로 유럽 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멋스러운 백발 머리에 프릴 앞치마를 두른 노부인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오는 길 내내 진눈깨비에 가파른 언덕 탓에 온갖 오만상을 다 지으며 올라왔는데 그렇게 힘들게 올라와서 만난 풍경이라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이 가게의 사장이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어머니는 어쩌시고 오늘은 혼자 오셨어요?"


아, 아마 나를 그 집의 따님으로 아시는 건가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하나... 지금의 내 처지를...


"그게 아니라 저는 해주세요 라는 심부름 어플에서 일하는 사람인데요. 이 집 따님이 코로나에 걸려서 밖에 못 나온다고 하길래 제가 시급 만원 받고 왔어요."


이렇게 말하면 내가 주인이라도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았다. 무엇보다 주려던 케이크도 안 주고 당장 그 딸이라는 분에게 전화를 걸어 진위를 확인할 것 같다. 난 잽싸게 얼버무렸다.


"그냥 혼자 왔어요."


쇼케이스 안에 있는 케이크들은 먹음직스러운 모양으로 빛깔을 뽐내며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유독 새하얀 케이크 위에 둘러진 빨간색 데코를 보다가 신혼여행으로 떠난 절에서 찍은 엄마 아빠의 사진 한 장이 생각났다. 새빨간 목도리를 두른 채 해맑게 웃으며 눈발 속에 서 있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눈은 계속 쏟아지고 그 눈을 헤쳐 겨우 겨우 배달 장소인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요청 사항에 쓰여 있던 대로 현관 앞에 케이크를 두고 뒤돌아서려고 하는데 심부름 어플의 채팅 알람이 울렸다.


"언니 혹시 통 있으세요?"

다짜고짜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그녀에게 놀란 건 둘째 치고, 통이라니? 웬 통?


"통 있으시면 케이크 담아 가세요 언니. 제가 직접 드리고 싶은데 격리 중이라 죄송해요ㅠㅠ"


그녀의 예쁜 마음씨 덕에 마음 한구석이 뜨끈해진 것도 잠시. 마땅한 통이 없기도 했거니와 생판 모르는 남의 집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상자에서 조심스레 케이크를 꺼내서 칼로 조각을 낸 뒤 통 안에 조심스레 옮겨 넣는 일련의 과정들을 상상해 보니 아찔했다.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날 본다면 딱 케이크 훔쳐먹는 도둑으로 밖에 안 보일 비주얼이다.


동생... 동생이라고 하니까 내가 말 편하게 할게. 케이크 안 줘도 되니까 그냥 팁을 더 주면 안 되겠니? 나 진짜 힘들게 왔는데...


본심을 감춘 채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뒤돌아서 아파트를 나왔다. 미련이 남아 괜히 심부름 어플을 들여다봤다. 마음 따뜻한 분인 것 같으니 추가 팁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애석하게도 그날의 추가 팁은 없었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 부모님 댁으로 가는 길에 무엇을 사갈지 마음속으로 정해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하얀 케이크에 새빨간 장식이 곁들여진 케이크를 사가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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