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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땡 Oct 12. 2020

예술한답시고

어째서 나는 미술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는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때는 불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고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어.'


-라고 네가 학부때 그랬어. 나 정말 깜짝 놀랐어.


-라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가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그런말을 했다고? 이 얘기를 들은 나야말로 깜짝 놀랐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무살 초반의 나,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거야?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고 천지분간 못하고 떠들어대는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다. 아니 더 먼 과거, 2008년으로 돌아가 때려 죽여도 못하겠다며 미술학원을 박차고 나왔더라면 지금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 아니다. 이 지긋지긋한 인연을 끊으려면 훨씬 더 과거로, 미술 수행평가란 수행평가마다 족족 만점을 받기 전으로- 아니, 만화라는 신세계에 눈뜨기 전으로- 아니, 애초에 미술가인 엄마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1992년 2월 20일, 늦은 밤에 태어난 나의 생년생시를 들고 할머니는 용하다는 역술인에게 '예술을 할 사주다'는 말과 함께 내 이름을 받아오셨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려서부터 나는 (그 나이의 또래라면 으레 그렇듯) 그림을 즐겨 그렸고, 엄마가 집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던터라 그 틈에 끼어 제법 완성도 있는 그림들을 그려나갔다. 나의 화려하고 정밀한 (물론 엄마의 손길이 가미된) 그림일기에는 내가 화가 같다는 담임선생님의 감탄 어린 코멘트들이 달렸고 덕분에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미술대회란 미술대회는 전부 내 차지였다. 하지만 이제와 밝히는 거지만, 그건 전부 엄마가 그려줬다. 그 당시 내가 관심 있었던 그림은 오로지 만화책 속 그림뿐이었다.


확실히 엄마는 내게 어려서부터 폭넓은 예술활동의 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피아노, 발레, 수영, 글짓기, 미술 등을 배우게 해주었고 엄마가 갤러리서 작품을 전시하는 동안 인사동 골목골목을 뛰어다니며 놀았던 기억도 아직 남아있다. 다만 초등학생 때의 나는 그림보단 글이 더 좋았고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글 쓰는 것보다 연기하는 것이 더 좋았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갑분연기(갑자기 분위기 연기)? 할 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쓰면서 어처구니가 없다. 나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이/청소년이었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 관심사의 프로세스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그건 바로 그림->그림+글->만화책->애니->성우(목소리 연기)-연기 였던 것 같다. 사춘기가 이상한 쪽으로 발현된 것인지, 15살의 나는 넘쳐나는 자기애를 마구 분출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타고난 성향이 내성적이라 반을 휘어잡는 분위기 메이커는 꿈도 꿀 수 없었지만 학교 게시판에 붙은 연극부 모집 공고에 가슴이 뛰어 그 날로 바로 오디션을 봤다. 심심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바꿔가며 책을 읽는 취미가 있었던 터라 오디션에서 받은 짤막한 대본을 읽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같이 오디션을 보러온 다른 친구들이 내가 연기하는 걸 보고 눈이 동그래져 박수를 막 쳐주던 것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래 바로 이거야!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학교 강당서 발표한 (당연히)주연으로 선 20분짜리 짧은 연극에서 나는 이미 나의 길을 정해버렸고 예고 연기과 입시를 위해 연기학원 입시상담을 받기에 이르렀다. 나름 동네서 큰 연기학원에 갔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 곳의 원장님은 그냥 인문계에 갈 것을 권했다. 정 연기를 하고 싶거든 고 2 여름방학에 다시 오라고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이건 내 청소년기의 꽤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원장님의 조언대로 일반고에 진학한 나는 2년 뒤 연기학원이 아닌 미술학원에 갔으므로. 처음부터 내가 연기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엄마는 일반고에 진학하게 되자 내심 안도하는 눈치였다. 고1때 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독히도 완벽한 문과의 뇌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찍이 수포자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 일주일에 세번, 수학학원에서 여섯시간씩 버티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엄마가 미대 진학을 권유한건 고1 겨울방학쯤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의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제안을 오케이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도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솔직히 니 성적만으로 너 인서울 못 보낼 것 같았어'. 나중에야(내가 학부를 졸업하고 나서야) 내막을 실토한 엄마의 입시전략을.


미대 입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디자인 혹은 순수미술. 처음 입시를 시작 할 때만 해도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호기롭게 디자인 입시를 시작했다. 내 꿈은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는거라고!... 하지만 왠걸, 하면 할 수록 내 적성과 맞지 않다고 느껴졌고 고2 여름방학 무렵 나는 순수미술 회화반으로 반을 옮기고 말았다. 내 인생이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꼬인게 분명하다. 인생이란 참으로 얄궂어서 그 당시엔 이게 잘못된 선택이란걸 느낄 수 없도록 나를 대학에 철커덕 합격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인서울에. 하지만 새내기의 달뜬 캠퍼스 라이프도 잠시뿐, 2학년이 되자 바로 휴학을 해버렸다. 그렇다. 여차저차 미대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예에에술은 연극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하기 위해선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다. 대학로 연극판의 막내가 되느냐 또 한번의 입시지옥을 뚫고 학생이 되느냐의 기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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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막내도 안됐고 학생도 못 됐다. 아직 어리니까 학교에 한번 더 도전해 보자 하고 시작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에선 1차 낙방했다. 사실 연극원 입시를 연기과가 아닌 연출과 준비를 했었는데 그렇게 결정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다. 그토록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뭐, 연기보다 쉬울 줄 알았나?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결정이었던건 분명하다. 그래도 스물 초반에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입시준비를 하는 반년 동안 괜찮다하는 연극이란 연극은 싹 다 보고 분석문 쓰고 유명한 희곡이란 희곡은 다 읽고 감상문 쓰고...어쨌든 글을 엄청나게 썼다. 연출가란게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인줄 미처 몰랐다. 좋은 플롯이란 무엇이며, 인물 관계도는 어떻게 짜야하는지...그렇게 매일 같이 글 쓰는 연습을 했는데 본격적으로 글 쓰는 시험을 보기도 전에 오지선다형 1차 시험에서 똑! 떨어져버렸다. 나를 지도해 주셨던 선생님도 심히 당황스러우셨을 것이다. 으레 1차는 당연히 붙는다고 생각하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엉엉 울면서 엄마의 단골 점집에 찾아가 '저 연극 계속 해도 되나요?' 물었더니 휘파람을 휘휘 불던(그게 신을 부르는 거랬다) 아주머니는 '연극으로 성공하기는 좀 힘들어요~'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 아주머니는 있을 법한 얘기를 한 건데, 나는 그 말에 왜그리 쉽게 뒤돌아 섰는가 싶다. 애초에 내 마음이 그정도 였겠지. 하지만 당장 다시 미술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연출과 준비를 했던 것도 그렇고,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창작자보다는 기획자가 더 맞지 않는가(연출가도 어떻게 보면 창작자지만) 라는 생각을 했었다. 복학을 하고 나서는 축제 기획 강의를 들으러 다녔고 매 주말마다 홍대 플리마켓 자원봉사자를 나갔다. 락페스티벌이나 축제 스텝도 두어번 했다. 그러다가 홍대에서 매년 열렸던 예술 페스티벌에서 그토록 소원하던 연극도 한 편 공연했다. 여기까지 대충 한 일년 반에서 이년의 시간이 지났다. 일주일에 다섯 번은 들락거렸던 홍대의 문지방이 닳을 무렵, 갑자기 미련이 없어졌다. 다른 사람들과 무리지어 해야만 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여전히 공연이 너무 좋고 축제가 좋고 사람들과 으쌰으쌰 하는 것이 좋았지만- 나는 다시 돌아왔다. 미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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