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복음주의의 길> 완결 안내

by 생명의 언어

안녕하세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또 하나의 브런치북의 완결 소식을 함께 전합니다.


그동안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마음 한 편으로 독자분들께 대한 마음의 빚이 있었습니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곧 쓰는 자가 아니요 읽는 자로써 그 존재 의미가 결정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처음부터 "나만의 새로운 영적 정체성"을 신학적, 교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완성하려는 지적 탐구의 목적에서 쓰여졌기에, 글 자체가 매우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독자분들께서 읽으시기에 매우 무거운 짐이 되셨을 것이라고 느꼈으며, 이에 대해서 늘 마음 한 켠에 죄송스러움과 민망함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과 삶과 일상 속에서 스스로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저 글쓴이의 주관적인 신비 체험과 고백과 증언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그 신학적, 교리적 토대가 견고하고 굳건하여야 함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된 모든 서술과 논증과 해명들은 에고의 편협하고 주관적인 목소리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오직 내 안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뜻에 따라서만 철저하게 글을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지금 제 말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매우 논쟁의 여지가 있는 말인 줄을 압니다. 그러나 저의 말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읽는 분들께 온전히 맡기되, 저는 그저 두려움 가운데에서 제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용기를 내었을 뿐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진리에는 언어로써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언어의 구조 자체를 뛰어넘는 영역이 있습니다. 저는 그저 전자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증언하고자 하였고, 후자에 대해서는 결국 글쓴이의 한계로 인하여 조금도 증언치 못하였음을,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봅니다. 그러나 이 남은 "여백"은 앞으로의 제 남은 생애의 평생 동안 조금씩 부지런하게 채워나가고자 하며, 그 여정을 그분께서 함께하실 것임을 알기에, 솔직한 심정으로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지만 또한 함께 설렘과 기쁨이 충만함을 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의 가장 높음은 결국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시리즈의 글들은 혼(Soul)을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엄격한 영(Spirit)에 의해서만 쓰여지도록 쓰임받은 글이기에, 애초에 그 내용 자체를 "그분의 품 안에 거하지 않은 자"로서는 상당수를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이건 통로로써 옮겨적은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독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에 올릴 글을 쓰고 나면, 며칠 후에 다시 읽어도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싶은, "나를 통해서 쓰여졌지만 내 것이 전혀 아닌 것 같은" 그 느낌이 매우 강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임재와 역사의 증거이니까요. 다만 독자분들께는 그렇지 않으리라 조심스럽게 짐작해봅니다.


이 점에 대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조언, 내지는 당부랄까요.


글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의 인식/관념체계로는 영원과 초월로 계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된 영혼들끼리도, 소위 "우리끼리"는 통하겠지만, 그 각자의 영혼을 통해서 드러난 것들도 서로 각자 고유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모든 인격들을 통해서 드러난 글들이 다 똑같다면,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집단성과 자기를 동일시한 에고의 의식 구조를 자기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 의하여 이루어진 것들은 제각각 '고유'합니다. '특별'합니다. 그러므로 선문답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여 내 깨달음이 그의 깨달음보다 못한 것이 아니요, 이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여 오직 내 안에서 드러나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와 동행의 아름답고 은밀한 역사들이 다 무의미해지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는 것을,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임재와 역사는 개인적이고, 은밀하고, 아름답고, 특별합니다. 어찌 제가 감히 이것을 함부로 부정하거나 해치려 드는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사유"하는 과정 자체를 간접적으로 체험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이 글쓴이의 안에서 이루어진 "의식적-영적-초월적" 사유 과정 자체를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고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이해는 필요 없습니다. 이해하라고 쓴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고 나서 전혀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한 존재 안에서 성령께서 드러나셨을 때, 그 "의식 상태", "내면 상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느낌으로 읽으시면, 아마도 무언가가 다를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좀 하자면, 다른 글들을 쓸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홀로 된 부족하고 모자람 많은 가난한 놈이, 감히 교회와 기독교가 세운 전통을 토대로 하여 그것과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의 "민감성"과 "중요성", "무게감"에 대해서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곧 내 에고의 것이었고, 그럼에도 제게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 용기는 나 혼자서는 절대로 걸을 수 없는 이 길을 오직 그분께 대한 믿음과 사랑 하나로 인해서만 걸어갈 적에, 언제나 성령께서 함께하셨으며, 또한 함께하실 것임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교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학을 쓰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만, "대안적 가능성"을 열기 위함입니다.


많은 크리스천 형제들에게 호소하는 바, 교리가 왜 존재합니까? 그것은 결국 "복음의 성취와 완성"을 위한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되는 '복음'이라는 영적 역사가 내게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리 그 자체를 맹신하고 중얼중얼 반복하되, 그 내면에서 역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으며,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슬퍼하실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정통"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날 신을 부정하고, 신을 의심하고, "신"과 관련된 언어들에 대해서 대중들이 갖는 본능적인 거부감과 불편함과 배타성이라는 거대한 어두움을 마주하건대, 그 굳건한 어두움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 누그러뜨리고 아버지께로 그들을 가까이 데려가고 인도하기 위함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뜻하셨던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오늘날의 시대가 이토록 어두움이 깊을진대, 빛을 더욱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해서라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데 보태어 더하기 위해서라면, 그까짓 수단과 방펀 즈음은 이제 다소 간에 문턱을 완화하여 개방적이고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임하여도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너무나도 어두워져만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며, 죽느니만 못한 허무와 공허와 불안이라는 실존주의적-망상적 실체 안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무척 슬픕니다. 아픕니다. 그 슬픔과 아픔을 앞두고서, 나 혼자서만 그분을 만나뵈었다고 하여, "구원받았다"고 하여, 모른 척하며 가만히 숲 속에서 다 초월한 은자 흉내나 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라도 해야만 합니다. 내게 허락된 재능과 자질과 능력이 글쓰기이니, 글이라도 써야 합니다. 발버둥과 발악이라도 해야만 합니다.


이 글은 그렇게 쓰여진 글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부족함과 모자람은 모두 글쓴이의 죄로 인한 것이므로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되, 다만 "더 많은 영혼들을 복음의 진리로 인도하기 위한" 오늘날의 시대의 새로운 길 중 하나로써 이해하고 또한 쓰임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비록 저는 그분의 뜻에 따라 "교회 바깥"에 섰지만, 그럼에도 이 자격 없는 자가 허락되지 않은 말을 입에 올리건대, "나의 크리스천 형제들"의 진실함과 선(善)함에 대한 믿음을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분께서 제게 주신 길을, 홀로 조용히 걸어가겠습니다. 이 길의 여정에서 또한 만났다가도 또한 헤어지기도 하면서, 마지막 날까지 그렇게 우리들은 걸어가겠지요.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걸어가봅시다, 담대하게, 외롭게, 또한 함께.




사실, <신성한 수동태>를 완결지을 때와는 달리, 이 책을 완결짓기로 결심할 때에는 망설임도 아쉬움도 전혀 없었습니다. 어차피 이 책은 교리적 신학적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고, 관념은 관념일 뿐 결코 실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관념적 토대로서 처음부터 명확한 목적을 갖고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내게 허락하신 음성들을 다 전하였다는 기쁨, 후련함, 자유로움, 그러한 것들만이 내 안에 그저 남습니다.


어떻게 쓰임받을지는 이제 그분께, 그리고 읽는 분들께 전적으로 일임하며, 저는 이제 앞선 공지에서 말씀드린 대로, 당분간 요한복음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남은 글들도 잘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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