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수동태> 브런치북의 연재를 종료합니다.
안녕하세요. <생명의 언어>라는 이름으로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신성한 수동태> 브런치북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2025년 10월 10일 금요일)부로 <신성한 수동태> 브런치북은 공식적으로 완결(연재 종료)합니다.
글을 쓰면서 가능한 한 '나'라는 인격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영적 성장의 길을 걸어가는 영혼으로서의 나, 그리고 감히 신의 음성을 듣고 지상의 언어로 이를 옮기는 일을 하는 '통로'로서의 나, 만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자아(ego), '나'라는 개인의 정체성과 이야기는 가능한 제외하고자 하였고, 에고로서의 나의 목소리 역시도 최소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나'라는 개인에게 결코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분들의 스스로의 성장을 위하여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열망을 품고서 글을 읽어주시는 것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고로서, 저는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람이 많습니다. 저의 지난 수 년간의 여정들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었으며, 그 시기 동안 비록 영적으로는 깊이 부족함 없이 성장해왔다고 믿지만, 육적으로는, 현실적으로는, 해가 거듭할수록 외적인 상황은 점점 단계적으로 낮아지고, 무너지고, 좌절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존의 활동들이 모두 중단되고, 내가 진실로 하고 싶었던 일들이 모두 종료되고, 기껏 맺었던 인연들과 나 자신보다도 더 소중히 여겼던 그들과의 관계 역시도 이별하게 되었으며, 그나마도 남아 있던 마지막 희망마저도 불현듯 한여름 밤의 꿈처럼 무너졌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의 저는 여전히 갓 서른 살을 넘긴 미숙하고 부족함 많은 그 나이 또래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전히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때때로 죄를 저지르며, 내 안에 여전히 많은 숙제거리들이 남아 있음을 지금도 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는 것, 글을 쓸 때 가능한 에고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겸손질"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잘난 것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고 높여도 되지만, 에고로서 저는 그 무엇 하나도 잘난 바가 없음을 스스로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한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마저도 결국엔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것임을, 여정이 깊어질수록 결국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알리라"(마7:20)고 하셨으되, 내 안의 영적 성장의 결실의 열매들 중에서 그 무엇 하나도 '나'는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고, 생계 기반을 확신할 수 없으며, 내가 사랑하는 이 영적인 일들조차도 계속해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벼랑 끝까지 몰리고, 절벽 바로 앞에 서 있으면서도, 희한한 것은 지난 수 년간의 나의 좌절과 상실과 슬픔의 역사들이 "실패"라고, "불행"이라고, "불운(不運)"이라고 느껴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비록 이 시험의 여정을 통과하면서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팠고 슬펐고 고통스러웠지만, 내가 이 과정들을 단 한 순간도 '불행'이라고 느껴본 바가 없었으며, 너무도 당연하게 이 모든 과정들을 '아버지'의 뜻이라고, 인도받는 과정이라고, 그리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이 제게 너무나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제 눈 앞의 시련과 고난조차도, 비록 내 마음을 잠시 흔들게 할 수 있을지언정, 내 안의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구나.
저 자신에게 어두움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었기에, 그 가운데에서 그분의 임재와 역사라는 빛 역시도 특별했다는 것을, 내가 그 사실로 인하여 무척이나 기뻐하였다는 것을, 결국 내가 그것을 '열망'하였다는 것을,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글을 쓰면서 어려움을 느껴본 일이 없습니다.
모든 글을 쓸 때, 서론과 본론과 결론을 구성하고, 신학적 교리적 관점들과 학술 자료들과 데이터를 정리하는 등, 그러한 준비나 계획의 절차를 단 한 번도 거쳐본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성경 구절들을 인용할 때는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 AI를 활용하기는 하였지요(일일이 찾기가 너무 번거로웠으므로).
그러나 제게 글쓰기란, 그저 나의 영이 평소보다 더욱 깊어졌을 때, 내 영혼의 "에너지"가 평소보다 더욱 선명해지고 충만해지기 시작하였을 때, 그리하여 나의 존재가 신성과 더욱 강하게 연결되고 공명하기 시작하였을 때, 내가 이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적에,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에고로서의 모든 것을 멈추고, 그저 하얀 화면을 마주하고 앉았을 적에, 나의 영과 영혼이 그분의 품 안에 영원히 안기어 안식하는 그 절대적인 평화와 고요 한가운데에서 성령께서 오심을 깊이 느끼고, 또한 그분 앞에 엎드려 그 음성을 들으니, 내가 그 듣는 것을 어느덧 나도 모르게 전혀 막힘없이 글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며, 에고로서의 나, 깨어 있는 의식으로서의 나는 그 "흘러나옴"을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무어라고 말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에 겨우, "신성한 수동태"라는 어설픈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이것에 관한 한, 저는 매우 능숙하고 노련합니다. 마치 물고기가 태어나면서부터 바닷속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바와 같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신학적, 교리적, 신앙적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었고, 제대로 성경을 정독해본 적도 없었으며, 책이라고는 전혀 읽지 않은지가 어언 10년이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유영(游泳)"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너무나도 자유로웠습니다. 이것은 제게 태어날 때부터 허락된 재능과 자질과 능력이었음을 결국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에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물고기가 바다를 자유로이 유영한다고 하여 바다 전체가 물고기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나를 통하여 흘러나온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님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으며,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리고 글을 쓰고 난 이후에도, 나에게서 흘러나온 글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그 '낯섦'의 느낌이 너무 선명한 것입니다.
글쓰기는 제게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기도였고, 묵상이었고, 예배였고, 찬양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방식이었으며, 성령께 경외하고 충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모든 순간마다 나는 너무도 즐거웠고, 너무도 기뻤고, 너무도 감동스러웠고, 내 안에 늘 절대적인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한없이 넘쳐흘렀습니다. 경외와 경이로움과 열망이 늘 넘쳐흘렀습니다.
바로 그러하였기에, 문득 이 시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는 이제 너 자신의 즐거움으로 글을 쓰지 말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글을 써라."
그동안 신성한 수동태를 연재하면서, 그것은 나의 신비체험이었고, 나의 사랑이었고, 나의 열망이었고, 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성한 수동태는 신비주의였습니다. 그리고 신비주의로서 이 글들은 이미 소명을 다하였으며, 이제는 떠나보내야만 할 때가 되었음을, 그것이 그분의 명령이심을, 선명히 들었습니다. 들었으므로, 순종하고자 합니다.
아직 여전히 내 안에서 남은 것들이 많습니다...... 솔직히, 정말 솔직히, 저는 참 답답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나의 절실함을, 주님을 경외하는 나의 간절함을, 성령께 충성하고자 하는 나의 진실함을, 아무리 보여주고 또 보여줘도 너무도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영원한 생명"인데, 살아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살아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이것만이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결말을 앞둔 모든 인간 존재를 위해 주어진 구원의 길인데, 어째서 사람들은 마치 "나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저리도 아버지께 대하여 무관심하단 말인가? 왜 절실하게 진리를 구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미 저들은 다 깨달았단 말인가? 이미 저들은 다 구원받았단 말인가? 그것이 늘 참으로 답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답답함은 결국 "아는 자"의 무거운 책임이자 사명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글쓴이의 부족함과 모자람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웃고 모욕하고 무시하여도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간절히 당부하고 싶은 말은, "신을 사랑하라, 신성을 열망하라,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살 길입니다. 이것만이 영원히 살 길입니다. 내가 이리도 간절한 것을, 내가 이리도 절실한 것을, 이 모습으로 말미암아 글을 읽는 사람들 안에서도 이 "불씨"가 옮겨붙기를 너무도 깊이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 울분에 가까운 나의 열망이, 미친 놈처럼 아버지께만 충성하는 나의 이 정신 나간 신앙이, 아무리 표현하고 또 표현해도,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도저히 단 1%조차도 전해지지를 못하였습니다. 늘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너무도 할 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분의 의지에 따라 아름다운 끝맺음을 이루고, 또 다른 새로운 글들을 쓰기 위한 침묵과 고요와 내려놓음으로 침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쓰겠지만,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 브런치북도 함께 종료하고자 합니다. 두 글들은 이제 주어진 천명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별해야 할 때를 알고, 보내주고자 합니다.
당분간은 <오쇼젠 타로 : 영혼의 언어> 브런치북과(이 책은 여전히 73장이나 되는 카드들이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 시작한 <복음의 빛 : 요한복음 이야기> 브런치북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금 시기에, "요한복음 이야기"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 그분께서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뜻임을 이번에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요한복음 이야기를 쓰는 것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금요일은 오쇼젠 타로,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요한복음 이야기를 연재하는 것이 당분간의 일정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 요일들에는 쉬어가거나, "영감"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일단 비워두려고 합니다.
늘 감사했고, 또 남은 글들에 대해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