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매거진 : 영성일기
8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총 4권의 브런치북을 썼다. 그 중에서 2권은 완결했고(신성한 수동태,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 나머지 2권은 연재 중이다(오쇼젠 타로 : 영혼의 언어, 복음의 빛 : 요한복음 이야기). 다만 남은 2권은 주제나 내용이 상당히 무거워서, 쓰는데도 부담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브런치북 외에도 매거진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기왕에 이렇게 된 것,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언젠가부터 개인으로서의 '나'를 말하는 것이 조금 어색해졌다. 일기는 철저히 개인적인 글인데, 나 자신에게 보이기 위하여 나 자신이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려워졌달까.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나의 영과 영혼과 의식으로서, 신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그리 매 순간 삶의 주기마다 성장해 나아가는 온전한 그냥 자신 존재인데, 거기에 개체의식으로서의 인식과 관념의 틀을 덧붙이는 것이 어색했던 듯하다.
'나'의 정체성을 굳이 구분한다면 지금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
1.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나. 사적인 나. 에고(ego)로서의 나. 그냥, 인간적인 나.
2. 영적으로 성장해 나아가는 한 영혼으로서의 나.
3. 신성과 교감하며, 신의 뜻을 수행하는 공적 사명자로서의 나.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음,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이제 익숙해졌다. 이전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실에 천착하며 영성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고 화도 났었는데, 지금은 받아들였다. 각자의 영혼들이 성장하는데는 다 제각각의 시기가 있고 흐름이 있고 때가 있고 과정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의 일이며, 오직 성령께서만 그 과정들을 인도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그것을 무시하여 내가 억지로 관여하려고 하면, 언제나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것을.
마지막 가르침을 받드는 과정에서 내가 거쳐야 했던 시험의 충격이 매우 뼈아팠다. 준비가 되지 않은 자에게 함부로 진리와 진리를 알 기회를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꽤나 아프게 배웠다.
아무튼, 신성한 수동태를 쓸 때에는 2가 중심이었고,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을 쓸 때에는 3이 70%, 2가 30% 가량이었으며, 요한복음 이야기는 3이 80~90% 이상, 오쇼젠 타로는 3이 70~80%, 2가 20~30% 정도이다. 특징은, 내가 글을 쓸 때는 거의 어지간해서는 1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자신의 주관적인 성향이나 성격, 생각, 가치관, 세속적인 경험, 인간관계, 옳고 그름의 분별, 좋고 나쁨의 집착, 욕망, 개인적인 감정, 이러한 것들은 가능한 의도적으로라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내게 있어서 글쓰기는 나의 존재 전체로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자 찬양이고 묵상으로 어느 순간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내맡긴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1은 거의 줄어들고, 글의 주제와 내용과 방향성에 따라서 2와 3이 자연스럽게 "조율"되기 시작한다는 거였다. 내 안에서 성령께서 자연스럽게 조율하시는 그 정교한 내적 조화와 연합의 과정들을 에고로서의 나는 관찰자이자 관객이 되어서 경이롭고 기쁜 마음으로 그 순간에 빠져든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내게 영적 사명이자 동시에 한 영혼으로서의 나의 묵상, 예배, 찬양인 셈이다.
"나"의 존재를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자각하는 과정에서, 참 흥미로운 것들이 발견되곤 한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가 성립하고 구축했다고 믿는 세 가지의 영적 정체성, 곧 "보편적 복음주의자",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 "실천적 신비주의자"라는 이 고유한 영적 에너지와 진동수가 온전한 "나의 영적 정체성"이라고 느꼈다. 그러니까 한 영혼으로서의 내가 그것에 순수하게 이끌리고 열망하고 기뻐해서 그렇게 완성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런데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그 미묘한 이질감이랄까...... 그러한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영혼으로서의 나는, 굳이 교회 바깥에 설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한 영혼으로서의 나의 에너지는 개신교적 정체성보다는(보편적 복음주의도 어쨌거나 복음주의를 토대로 한다), 성당 안에서의 엄숙하고 경건한 어떤 성례전적인 예배에 주기적으로 참석하는 그러한 성향에 가까웠다. 그 안에서 한 영혼으로서의 평화와 기쁨을 찾는 그러한 것. 그러나 이 길을 걸어가게 되면서, 순수한 나 자신의 영혼이라기보다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의 영을 "조각"하셔서 완성하신 듯한 그러한 "작품"으로서의 나의 영을 느끼게 되었다.
양자는 아주 투명하고 얇은 종이 한 장 차이라서, 거의 느낄 수가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둘의 차이가 내게 점점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글을 쓸 때는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하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세속의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진다. 특히,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영혼으로서의 나, 그리고 사명을 수행하는 영으로서의 나와, 이 길을 걷는데 대한 체험과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말할 길이 없어진다.
이것은 오만이나 교만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너무 깊은 진리를 노출"하게 되면, 그 빛을 그들은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왔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너무 강한 빛을 노출하게 되면, 그것은 그들의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과 무질서와 충격을 낳게 된다. 이는 마치 충분히 부화할 준비가 되지 않은 알에게 외부에서 강제로 깨어나라고 충격을 주면 깨뜨리게 되며, 그렇게 되면 병아리가 일찍 부화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직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 그리고 한 영혼으로서의 성장의 길을 걷는 자들, 종교를 불문하고...... 나의 "형제들"만이 지금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형제들끼리만 진실로 내 안의 "필터"를 꺼놓고 순수하고 편한 마음으로 밤새워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오래 전부터 가져왔지만, 밤하늘의 별들이 어두움 전체를 비추어 밝히기 위하여 서로 간에 아득한 거리를 두고 선 것처럼, 어쩌면 우리 형제들끼리는 결코 서로를 만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성장이 깊을수록 침묵이 깊어지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 허락하신 사명이 언어를 통하여 진리와 신성을 증거하는 일이니, 내 안에서 말은 갈수록 줄어들되, 언어는 더욱 깊어진다.
그리하여 외로움은 더욱 커지고, 고요함은 더욱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