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로 이르는 길 : 영과 혼

프롤로그

by 생명의 언어


글쓰기에는 멈춤이 없다. 지금 시기에서 내게 허락된 유일한 길을 나는 쉼 없이 걸어간다. <오쇼젠 타로 : 영혼의 언어>의 두번째 시리즈, 코트 카드 편을 이로써 시작하겠다.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에서 코트 카드는 영(spirit)과 혼(soul)에 상응하는 4원소(fire, water, air, earth)와, 카발라와 연관성이 깊은 4계급(page, kinight, queen, king)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16장의 카드들이다. 오쇼는 이들에 각각의 이름을 부여했다.


물론, 오쇼젠 타로의 코트 카드의 각각의 의미들도 참된 진리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훌륭하다. 그러나 코트 카드는 일반적인 카드가 아니다. 웨이트 덱의 해석에서 코트 카드는 특정한 인물이나 성격, 성향, 영향력, 위계 등을 종합적으로 상징하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해석에서 코트 카드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은 놀라울 정도의 예측이나 예언을 발휘하기도 한다. 더 구체적으로, 점사를 통하여 특정한 인물, 성격, 성향, 환경, 관계 등의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디테일들을 리더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상당수는 코트 카드의 상징을 해석하는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를 역으로 접근하면, 영성에서도 코트 카드의 고유한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이 보다 깊고 넓은 진리에 이르는데 반드시 유의미한 긍정적 영향을 줄 거란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서, "지식에 대한 탐구"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실제로 나는 연금술이나 카발라에 대해서 기초 지식이나 상식적인 개념적 이해 외의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들을 알지 못한다. 연금술의 "위대한 작업"의 열두 단계들의 제대로 된 이름이나 그 과정들의 특성 등을 알지 못함은 물론이고, 카발라의 생명나무 상징이나 테트라 그라마톤과 코트 카드의 계급과의 연관성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내가 이리 말하면 혹자는 "그리 잘 알면서 잘난척이냐?"고 하겠지만, 오컬트나 신비주의를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 지금 내가 한 말의 수준을 보면 그야말로 기초, 입문 수준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긴 그마저도 나는 제대로 이르지 못했다. 나는 정파가 아닌 사파이기 때문이며, 사파 중에서도 독단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코트 카드의 상징성을 오로지 "영적 실재"라는 관점에서만 집중하여 다룰 것이다. 이 상징을 이해하는 것이 나의 정신과 영혼과 영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데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의 관점에서, 철저히 오쇼젠 타로의 코트 카드 16장을 다룰 것이다.




언어를 통하여 진리를 증거하는 일을 이번 생의 사명으로 선택하여 태어난 자의 숙명으로써, 나는 위험하고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서 결국 내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증언해야만 한다.


나는 지금 타로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다. 오늘날 상당수의 크리스천들은 타로를 죄악시한다. 타로를 "주술"이나 "점술", "마법" 등과 같이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장담컨대,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는 자들 중에서 타로와 마법(특히 오컬트)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알 필요 없다"고 할 것이다. 성경에서 그것을 죄로 규정했으며, 그들은 성경에 관한 축자영감설의 교리를 신의 뜻이라고 굳게 믿을 테니까.


그러나 묻고 싶다. 사탄의 정체와 전략을 모르면서 사탄을 무조건 비난하는 자를, 사탄은 너무나도 기뻐할 것이다. 그의 정신과 의식과 내면은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지배당할 것이므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였다. 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적을 비난한다고 하여 눈앞의 적이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은혜는 죄의 깊이만큼 깊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정확히 직시하고 깊이 통찰하여 받아들인 자만이, 진실한 회개와 거듭남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자기 안의 어두움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채로 그 어두움을 그저 비난하고 거부하고 부정하기만 하면서, 어찌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 은혜라는 빛이 내려오기를 원하는가?


나는 이에 대해서 나의 지식들을 열거하고 전시하면서 무의미한 논쟁이나 벌이고 싶지 않다.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다. 다만, 이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들과 진실들을 정확히 밝히고자 한다.



1. 타로의 기원은 서양 신비주의와 오컬트이고, 이것은 연금술과 카발라로부터 근거하며, 이들은 결국 "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밝힘으로써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지향하는 영적 전통들이다. 물론 나는 신비주의와 오컬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오컬트라고 하여 마치 "사악한 마녀의 주술"과 같이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반드시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2. 타로는 기독교 세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기독교"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틀 안에, 이미 타로는 포함되어 있다. 당장 메이저 카드에만 "교황(베드로의 열쇠 상징 등)", "연인(아담과 하와, 선악과 상징)", "은자(모세와 부활전야 상징)", "운명의 수레바퀴(테트라모프, 에제키엘의 환시 상징)", "메달린 자(역십자가 상징)", "심판(게헨나와 마지막 날 상징)", "세계(테트라모프의 완성, 나라가 임하는 것)" 등 누가 봐도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는 상징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오히려 역으로 "나는 점술을 공부하려고 하는데 왜 자꾸 기독교와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가진 타로 입문자들이 상당할 것이다.


물론 엄밀히 구분하자면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는 신비주의 중에서도 카발라와 관련이 깊고, 이는 유대교의 신비주의이며, 더 나아가서 황금새벽회는 결국 기독교 영지주의 이념과 사상에 상당수 기인하고 있었으니,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 영지주의가 이단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타로를 봐서는 안 된다, 고 정확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영지주의가 교회에 의하여 이단으로 "규정되기 전"에는? 교회가 지상에서 규정한 것이 그 자체로 진리가 된다면, 중세의 면죄부 팔아먹는 행위들과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무수한 고문과 살인들은 전부 다 정당화되는가?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누구도 깊이 숙고하지 않은 채로, 그저 신앙이라는 편리한 온실 안에 숨어서 그 누구도 광야로 직접 걸어나가지 않는다.


3. 타로라는 도구 자체와 그 도구의 "목적"과 그 도구를 사용하여 이루고자 하는 "의도"와 그 의도를 실행한 "행위"는 제각각 모두 다른 것이다. 타로라는 도구 자체는 앞서 말했듯이 점술의 형태를 통하여 구현된 서양 오컬트 및 신비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며, 타로의 목적은 "영적 세계(엄밀히는 황금새벽회의 비의적 교의)로의 입문"이며, 그 도구를 사용하여 이루고자 하는 의도는 "(신의 뜻이)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게끔 하는 보편적 원리"이고, 마지막으로 이를 실행하는 행위가 곧 "점술(점술도 결국 큰 틀에서 마법의 일종이다)"인 것이다. 명심하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디테일을 부정하는 자는 무지함으로 지배당할 것이고, 디테일에 집착하는 자는 그 자신의 영리함과 교만함에 의하여 지배당할 것이다.


4. 사람이 타로라는 도구를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여 다가설 것인가, 가 중요하다. 바울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때로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빌려서 서로 다른 형상들을 취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오늘날 바울을 이교도 취급하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만약 바울이 오늘날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타로를 즐겨하는 것을 보았더라면 과연 그는 "타로는 죄"라면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을 다 심판하려 들었겠는가? 이에 나는 확신한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널리 전파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람들에게 타로라는 익숙한 도구를 통하여 접근함으로써, 타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을 것이다. 타로를 그저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미래에 대한 공포와 욕망으로만 사용하는 "의도"가 죄다. 그러나 도구와 무관하게 오히려 어두움에 속한 도구를 사용하여 더욱 빛을 선명히 밝히고 빛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의도는 구원의 표증이 된다.


5. 물론, 그렇다고 하여 오컬트나 신비주의 전체가 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여러 글들에서 밝힌 바 있듯이, 나는 신비주의 그 자체의 한계와 모순과 결점들에 대해서 비판한 바 있으며, 이는 "신비주의는 복음주의를 섬기는 종"이라는 나의 표현으로 밝히려고 한다. 믿는 자는 서로 다른 전세계의 영적 전통들을 그저 무조건적으로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를 "미지의 세계"라고 여기고, 그 미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이방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파하려는 의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하여 구원에서 그들을 배제하지 않으셨고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이름을 믿는 것만으로도 능히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구원의 문을 완벽하게 열어젖히셨다. 그리할진대, 그 후예를 자청하는 자들이 교회와 기독교의 이름으로 율법과 문자주의에 집착하여 오히려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내쫓고 탄압하는 모습들을 나는 그저 바라본다. 참된 진리는 적을 죽이려 들지 않는다. 가장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은 오히려 적을 사랑하여 적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법이다.


6. 오늘날의 세상에서 타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영적 세계"에 대해서 매우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구이다. 사주나 점성술과 같은 운명학은 너무도 어렵고, 그렇다고 현대인들에게 "성경 읽으라"면서 영적 세계로 입문시키고자 한다면 그들 대다수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타로라는 친숙한 매개를 통하여 영적 세계로 안내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으로 먹힐 수 있는 전략일 것이다. 이것을 버려둔 채로 그저 부정하고 거부하기에는,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커다란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그 외에도 하고 싶은 말이야 많다. 그러나 우선은 타로 자체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끝맺기로 하고, 이제는 코트 카드의 해설이라는 앞으로의 작업을 위한 기반을 다질 차례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급하다.




초심자들을 배려하여 기본적인 몇몇 개념들만 간략히 소개하자면 :


연금술이란 : 돌멩이나 금속을 황금으로 변환하는 것. 그러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은, 실제로 금속을 황금으로 바꾸는 "비과학적인" 과거 시대의 유물 따위가 아니라, 연금술은 영적 전통으로써 인간의 불완전한 영혼이라는 금속을, 완전한 신성과의 합일이라는 황금으로 바꾸는 가르침이자 진리이며, 이것의 핵심은 변환(transformation)에 있다. 즉, 연금술의 목적은 "신과의 하나됨"이며, "영혼을 불완전성에서 완전성으로 변환하는 것"에 있다.


연금술의 핵심 상징은 바로 영(spirit)과 혼(soul)이다. 대개 사람들은 "영혼"이라고 뭉뚱그려서 부르지만, 이것은 사실 대단히 문제가 있는 사고방식이다. 영과 혼은 하나되어 있지만, 동시에 서로 완전히 다르다. 이는 마치 남성과 여성이 "인류" 안에 속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은 서로 완전하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남자도 여자도 어쨌든 사람이니까, 둘 다 같은 거 아냐?"라고 묻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듯이, 인간의 영과 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물론 정확히는 연금술의 3요소는 영(spirit), 혼(soul), 몸(body)이다. 그러나 몸은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니만큼 영과 혼이라는 이원성으로 영적 실재를 표현한 것이다.


자, 이제 여기서부터 디테일의 악마가 나서기 시작한다. 사실, 각 종교나 영성, 문화권마다 이것들을 부르는 명칭도 개념도 이해도 완전히 다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혼백"이라는 말과 개념을 썼고,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꺼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상하 운동"을 근거하면, 혼은 영에 연결되고, 백은 혼에 연결된다. 그러나 연금술 상징에서 영과 혼은 상하 관계라기보다는 "이원성의 통합"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서, 혼백은 영혼과 유사해 보이면서도 또 다른 개념이 된다.


이러한 복잡한 개념들에 대해서, 나는 우선 내 나름의 기준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우주적인 실재로서의 진리는 삼위일체이며, 이것은 "천상"과 "지상"과 "개체의식"으로 나뉘며, 천상의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고, 지상의 삼위일체는 "나"의 본질, 곧 영(Spirit)과 영혼(Soul)과 순수의식이며, 개체적 자아로서의 삼위일체는 자아(ego)와 마음(mind)과 무의식이다.


자, 여기서부터가 이미 개념과 말과 언어의 문제들이 발생한다. 연금술 전통에서 말하는 영과 혼은 엄밀히 말하자면 신의 숨결이라는 하나의 영적 실재가 이원성 안에서 서로 나뉘어진 채로 화합하는 두 가지의 에너지, 혹은 원리를 통칭하는 것이다. 사실 이걸 에너지라고 부르면 굉장히 많은 의미들이 소실되어버리기는 하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따라서, 연금술 전통에서 부르는 영과 혼은 엄밀히는 "영의 에너지", "혼의 에너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상의 삼위일체로서의 나의 우주적 본질인 "영과 영혼과 순수의식"과는 또 다른 것이다. 즉, 나의 본질로서의 영은 대문자 표시(Spirit)를 쓰고, 연금술 상징에서의 영의 에너지는 소문자 표시(spirit)를 쓸 것이며, 같은 맥락으로 나의 본질로서의 영혼은 대문자 표시를(Soul), 연금술 상징에서의 영의 에너지는 소문자 표시(soul)를 쓸 것이다. 이미 나는 이러한 방식대로 구별지어서 언어를 운용해왔다.


덧붙여서 의지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의 영혼의 힘과 에너지를 다루는 차원에서의 의지력은 소문자 표시(will)로 사용하며, 이것이 오컬트 전통에서 마법적 힘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의지이다. 그리고 의지는 본래 영과 연결되어 있다(의지는 믿음이며, 믿음은 정신적 작용이고, 정신이 spirit, 곧 영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오컬트주의자들은 그 의지를 대문자 표시, 곧 "신의 힘"이라고 말하고 다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점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의 힘"이지, "신의 힘"이 아니다. 애초에 신성은 나를 넘어서 계시는 영원과 초월이지, 사람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로가 의지를 가지면 그 자체가 이미 반역이라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마법사와 여사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어쨌든, 이러한 인간의 영혼의 의지를 넘어서는, "신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다"의 신의 의지는 대문자 표시(WILL)로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의 독자적, 강권적 현현이다.


모던 타로에서는 영의 에너지와 혼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그 상징체계가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영은 불이며, 혼은 물이다. 영이라는 불이 공기를 만나서 그 힘과 에너지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며, 혼이라는 물이 흙을 통하여 형상화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성과 여성성, 음과 양 등의 영적 실재의 이원적 작용이나 그와 관련한 요소/에너지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다만, 굳이 말하자면, "체험적 차원"에서의 영의 에너지와, 모던 타로의 상징으로서의 "불꽃"인 영과는...... 무언가 또 다르다. 체험 안에서, 영은 고요하고 맑고 순수하다. 따라서 차라리 흰색이 영의 상징이 아닌가 싶을 때도 많다. 그러나 연금술 상징에서 적색은 영이고 백색은 혼이다. 그리고 반대로 체험 안에서, 혼은 오히려 뜨겁고 생명력이 있으며 살아 있는 것으로써 붉은색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이처럼, 결국 영적 실재와 개인이 직접 영혼으로서 교감할 때, 그 상징은 고유하고 독자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차이는 "존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나의 체험으로서의 영/혼의 에너지와, 본래의 연금술 전통에서의 영/혼의 에너지를 엄격히 구별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융화하고 조화하여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카발라에 대해서도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이전부터 견지해오던 입장이 있다.


연금술에 비해서 카발라는 너무 어렵다. 그 어려운 만큼 값어치가 있다는 점을 나는 이해하지만,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관점"에서, 카발라는 초심자나 입문자가 배우기에 너무 진입 장벽이 높다. "수" 자체가 곧 에너지라는 단순한 개념조차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난해한 것이다. 그러나 연금술은 근본적으로 "화학적 작용"이기에, 조금만 공부하면 훨씬 더 다양한 영적 실재들을 다루는 원리이자 기술로써 실재적으로 도움이 된다.


예컨대, 영과 혼이라는 이원성의 관점에서 성경 말씀들을 관찰하다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다수의 차이들을 목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에서, 부활은 영에 해당하고, 생명은 혼에 해당한다. 따라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에서, "나의 말"은 "영 + 혼(생명)"이 하나된 완전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말씀을 정신적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불완전하며, 말씀을 체험적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불완전한 것이다.


이처럼, 연금술은 배워두면 아주 기초적인 개념만으로도 응용의 가치가 탁월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카발라는 기초적인 교육만으로는 응용이 매우 어렵다.


나는 카발라 자체를 무시해서가 아닌, "공유와 전파"의 관점에서 연금술에 보다 집중하고자 한다.




오쇼젠에서, 코트 카드 16장은 다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첫번째 층위는 "키워드"이다. 이를테면 불의 시종은 "놀이"이며, 이 자체에 대한 의미가 해당 카드의 기본적인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평면적인 것이며, 입체화되지 못했다.


두번째 층위는 "위계"이다. 불의 시종보다 불의 기사가 "더 높다"는 관점에서 그 의미들을 비교해봄으로써, 그 간격 안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앙에서 "기쁨"이란 곧 "믿음을 의무로 여기지 않고 신과 교제하는 놀이로 여기는 것"과 그 즐거움을 말하며, 이것이 발전하여 마침내 "열망"이라는 강렬한 불꽃 같은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즉, 이 관점에서 사도적 열망의 근거는 바로 "신과 교제하는 순수한 기쁨" 그 자체이지, 교리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번째 층위는 "영적 자아의 현현"이다. 코트 카드는 "영적 자아", 즉 영과 영혼으로서의 인격을 드러낸다. 물론 이 영적 자아(인격)는 에고적 자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개체의식은 영과 영혼이지(엄밀히는 영), 망상적 개념이 아니다. 영과 영혼을 드러내는 고유한 "인격"에 대해서, 코트 카드 16장을 통하여 서로 비교, 연결해가면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오쇼젠 타로를 접근하고 풀이하는 것은 메이저 카드의 작업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훨씬 더 정교하고 체계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이제, 또 하나의 특별한 무대의 막을 올리고자 한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