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혼, 육의 상징과 의미

by 생명의 언어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에서 코트 카드는 매우 특수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 번에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일단 한 번 전체적인 틀을 이해하고 나면 무엇보다도 영적 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심지어, 복잡하고 어려운 단계까지 공부할 필요조차도 없다. 연금술의 핵심 상징과 개념 몇 가지만 이해하면, 이를 응용하여 얼마든지 복잡하고 어려운 말씀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사실 이 말씀에 대한 중요한 힌트는 뒷부분에서 등장한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일들을 보고 나를 믿으라."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빌립에게 큰 빚을 진다. 그가 질문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매우 중요한 열쇠를 주신 것이다. 이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간의 상호 관계성을 절묘하게 드러내신 말씀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이다 : 이것은 본질, 근원, 영원, 초월, 하나님(성부)...... 등을 의미한다. 문자 그대로의 드러나지 않은 본질을 의미하며, 사람은 "드러나지 않은 영" 그 자체를 직접 보거나 듣거나 경험할 수 없고, 심지어는 드러나지 않은 영에 관한 한 이해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식조차도 할 수가 없다. 영에 관한 한 허락된 것은 '감지'이다. 인식과 감지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보이는 것은 "육"이다 : 이것은 현상, 실체, 일어난 것, 사건, 육신, 물질...... 등을 의미한다. 문자 그대로의 드러난 현상, 사건, 물질 등을 의미하며, 이때의 육은 단지 "생물학적인" 육체나 "물리적인" 사물, 물질, 물체만을 포함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마음(mind)도 육에 속한다. 우리는 마음 안에서 여러 감정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영과 육의 관계성은 이러하다 : 첫째, 수직적인 위계가 있다. 영은 위이고, 육은 아래이다. 이것은 절대 불변의 영원한 진리이며, 육이 영보다 높아질 수는 없다. 이는 원인이 결과를 일으키는 것이지, 결과가 원인을 만드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어제 술을 마셨으므로 오늘 숙취가 있는 것이지, 먼저 숙취를 경험하고 나서 나중에 술을 먹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 영이 육을 다스리고 통치한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이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이며,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이다. 즉, 보이지 않는 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대로 보이는 육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지며, 육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영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영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육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존재, 사건, 현상도 없다. 이 법칙을 이해하면, "보이는 외적인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보이지 않는 마음, 자아, 무의식, 영혼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 것이다.


셋째, 영은 육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고, 육은 영을 통하여 "완성"된다. 즉, 영과 육은 상호관계성이다. 영이 영으로서만 남는다면 그것은 무용하다. 영은 보이지 않은 채로 영원과 초월 안에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지상으로 보내셨겠는가? 이 자체가 결국 하나님의 영이 "드러나시고자" 하는 명확한 "의지(WILL)"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 하면, 현현 이전의 하나님께서 현현하신 하나님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나 영과 육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반대로, 육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며, 육이 영과 연결될 때 마침내 "완전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온전함, 이 더 적절하다)"을 얻는 것이다. 이때의 완전함이란 에고적인 관념 하에서의 고정불변의 완성된 실체라는 뜻이 아니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채 근원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에 지배당하던 육의 존재가, 영과 연결됨으로써 온전한 자유, 평화, 기쁨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즉, "본래 하늘에서 의도된 존재로의 완전한 회복"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영은 육을 통하여 드러나고, 육은 영을 통하여 완성된다.


이것은 이원성의 원리대로 영적 세계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보라, 영과 육이라는 간단한 개념만 이해하더라도, 이를 통해서 저 말씀의 본질을 곧바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빌립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믿겠나이다"고 질문하였다. 이 당시 빌립의 의식 안에서는 죄성적 구조, 즉 "육이 영보다 높고, 영보다 육에 더 집착(욕망)하며, 영보다 육이 더 진짜라고 믿는" 망상적 관념체계가 작동하는 상태였다. 따라서 영과 육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빌립은 보이는 육이 아닌 보이지 않는 그 자체의 영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본래 그렇게 창조되지 않은 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한 일들로 인하여(보이는 육) 나를 믿으라(보이지 않는 영)"고 하신 것이다.


나아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이라는 표현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이건 단순히 같은 의미를 반복한 것이 아니다. 전자(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는 곧 육이 영 안에 거함을 상징한다. 후자(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는 영이 육 안에 거함을 상징한다. 물론 예수님의 육은 "죄 없이 완전한 인격"으로서 일반적인 인간의 육(body)과는 다른 위계를 거느리신다. 다만 설명을 위해서 이렇게 정리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써 온전함을 얻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심으로써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육은 영을 통하여 완성되고, 영은 육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보이지 않는 영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이 개념적으로는 뻔히 알면서도 놓치는 지점이다. 잘 보라, 영이 육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육이 영 안에서 거하게 될 적에(영과 육의 하나됨), 그의 영혼은 평범한 일상 속의 "보이는 것"(예: 햇빛, 바람, 나뭇잎, 꽃, 풀 등)에서 "보이지 않는 것"(예: 하나님의 임재)을 "볼 수 있다." 이때의 봄은 물질적인 경험이 아니다. 육을 통하여 드러난 영이 보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가 보이는 현상을 통하여 흘러들어온 것이다. "햇빛" 그 자체는 영이 아니다. 햇빛은 그냥 햇빛이다. 도대체 햇빛에 뭐가 있다는 거야? 하고서 하루종일 햇빛을 봐도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흔히 다 경험하는 그 햇빛이 전부다. 그러나, "무언가" 완전히 다른 감각이 열리게 될 적에, 이 말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오쇼는 침묵 카드에서 이것에 대해서 "침묵은 거의 보일 수 있고 거의 만져질 수 있는 절대적으로 선명한 그 무엇이다"라고, 참으로 절묘하게 은유했다.


이에 대해서 내가 표현하자면 : "햇빛 그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햇빛을 통하여 하나님은 드러나신다." 또한 이를 확장한다면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지만,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신다." 이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하늘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숫자 3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야 한다. 3은 "원형상징"이다. 말이 어려운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보편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참으로 신비롭게도, 수천 년 전에는 지구 반대편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문명이 서로 절대 교류할 수 없었을 터인데(교류했다 한들 깊은 수준까지 이르기 어려웠을 터인데), 그들의 신화 등에는 "공통된 상징"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모두 하나의 무의식 하에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숫자 전체는 원형상징이 아니다. 1,2,3은 원형상징에 해당하고, 4 이후부터는 문화상징, 즉 각 지역이나 문화마다 다른 의미를 띤다. 예컨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444라는 숫자를 보면 대단히 불길하게 생각하지만, 서양 신비주의에서는 444는 엔젤넘버로써 "보호와 통치의 안정성"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 숫자 3은 "삼위일체의 신성"을 뜻하며, "완성된 신성(의 현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모든 개념이나 원리 등은 3으로 매듭짓게 된다. 이것이 "신성한 삼각형"이다.


신성한 삼각형과 연결되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프렉탈 구조"에 관한 것이다. 즉, 이것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를 좀 더 확장한 개념(실재)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인간의 인식,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의 세계이지만, 이것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위의 보편적 구조가 아래의 세밀한 구조에서도 고스란히 그대로 구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종종 천문학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증언하고는 하는데, 인간의 세포와 우주의 구조가 닮아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이와 관련된다(사실 전문 지식이 전혀 없어서 정확히 설명을 못 하겠다).


그러므로, 신성한 삼각형에도 단계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완전한 "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나"라는 것은 개체의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수직선"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나" 전체이다(이에 대해서는 오쇼젠 타로 : 존재 카드 편 참고).


1. 천상의 삼위일체 : 성부(근원), 성자(현현), 성령(작동/실재). 사실 삼위일체의 각 위격들에 대해서 이렇게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 개념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지만, 설명을 위해서 간략화하였음을 밝힌다. 천상의 삼각형은 나의 "최상위" 차원이며, "나는 누구인가(WHO I AM)?"의 의식의 초점이 최상위 단계까지 상승했을 때 도달하는 궁극적인 자리이다. 간단히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 "나(ego)는 내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참된 나(i am WHO I AM)이다"이며, 이는 의식의 초점, 곧 "나"에 대한 동일시가 신에게로 옮겨감을 뜻한다. 사실, 이 단계는 거의 체험되기 어려운 지점이며,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순종" 등의 개념들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체험되는 지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울의 그 유명한 증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가 정확히 일치한다.


2. 지상의 삼위일체 : 영(Spirit), 영혼(Soul), 순수의식(Pure Consciousness). 이것은 그나마 "나"라는 실재적인 존재의 근원에 가까운 구조이다. 성부-성자-성령의 하나님이라는 최상위 삼각형 구조가 "나"라는 소우주의 차원에서 좀 더 구체화되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이 차원도 엄밀히 말하자면 "상위 차원"으로써, 흔히 사람들이 환영이나 계시를 본다거나 하는 그런 실제적인 차원보다 아득히 더 높이 있다. 그래서 각 지역의 토속 문화(예: 무속신앙 등)에서 '영'이라는 글자를 쓰는 건 사실 맞지 않다. 그것은 실제로는 "물질에 더 가까운 낮은 차원의 에너지가 개체의식의 사념에 의해서 불안정하게 뭉쳐진 것"을 영 또는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는 그렇게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3. 물질의 삼위일체 : 자아(ego), 마음(mind), 몸(body). 사람들이 대개 이해하는 "귀신"이나 "악령" 내지는 "천사" 등과 같이 실제적으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이나 사념체 등이 대부분 다 이 영역에 가깝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성"의 차원에서의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영(Spirit)의 에너지와 착각하고 있다. 나의 "영혼(Soul)"의 에너지는 엄밀히 말하자면 영의 통치를 받는 에너지다. 따라서 그 어떤 "사념체"도 가장 열등한 개체의식의 "본체로서의 영혼"을 흠집 하나도 낼 수 없다. 다만 그의 의식 안에서의 참된 구조가 죄성적 구조로 역전된 탓에, 두려움/공포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착각할 뿐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죽음 이후에 "지상에 갇히지 않는다." 영혼은 본래부터 자유롭고, 영은 본래부터 하나님과 함께이기 때문이다. 다만 살아 있을 적의 "개체의식"의 죄성적 구조의 진화 단계(이 말이 거북하다면 "성화 단계"라고 이해해도 거의 비슷하다; 어차피 신앙의 언어는 대부분 영적 실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에 따라서 "실제로" 지배를 받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사랑하사 가장 위대한 권세를 각 사람 안에 심으셨으니, 이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의지"와, 그 의지를 이룰 수 있는 "힘"과, 그 힘을 통하여 이룰 수 있는 "창조"이다. 즉, "믿는 대로 된다." 특히 사후에는 물질적 몸이 없으므로, 무의식적인 자아의 "인식"이 진화 단계에 따라서 무방비로 어두움에 노출될 것이다.


이 전체가 다 "나"이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를 쭉 펼쳐보이자면 :


성부(하나님) - 성자(그리스도) - 성령 - 영(Spirit) - 영혼(Soul) - 순수의식(Pure Consciousness) - 자아(ego) - 마음(mind) - 무의식(개인/집단) - 몸(body)


이러한 구조를 띤다. 이때, 자아와 마음은 거의 사실상 무의식에 가깝고, 집단적 무의식은 어두운 에너지, 곧 원죄, 까르마 등으로 불리며, 이것이 특정한 사념과 공명하여 현상회되는 것이 바로 "영적인 현상(실체)"들이다. 좀 더 엄밀히 구별하자면 까르마는 원초적 에너지로서의 어두움에 더 가깝고, "죄" 또는 "업"이라는 것은 이 원초적 에너지가 개체의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지배, 장악하는 패턴, 작용에 해당한다. 어쨌든 결론은, 모든 인간들은 이 "나"의 수직선의 구조를 따라서 영적-의식적 진화를 이루며, 이것이 삶의 목적이고,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순환"을 따라서 진화하며, 진화에는 목적이 없고, 과정 자체가 곧 목적이며, 지상에서의 삶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나"의 의식을 상승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길"이며, 이것은 모든 영혼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걷고 있는 길이다.


이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의 초점"인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이 존재의 수직선을 따라서 점점 위로 상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의식의 초점이 낮을수록 어두운 에너지에 훨씬 더 쉽게 지배, 장악, 기만당한다.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참고로 힘과 강제력은 엄연히 다르다, 참된 힘은 영원하고 완전한 영 그 자체, 곧 하나님의 권능이 나의 영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자, 이 경우에서, 평생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이 의식의 초점의 어느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쯤은 본인들이 스스로 다 느끼고 있을 터인데,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채로 살아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이기적이고 추악한 욕망대로 산 자는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런 힘이 없는 어린아이가 무방비하게 범죄자들의 소굴에 던져진 마냥, 어두운 에너지들이 "실체화"된 것들에게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게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체험"으로써 그의 영과 영혼 자체는 어떠한 경우에도 침범당하지 않으며, 그 체험에도 "한계"는 있고 언젠가 종료되어 다음 단계로 넘어갈 테지만(애초에 하나님 자신을 제외하고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영원하지 않다, 모든 것은 언젠가 변화한다), 그것이 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불쾌할 거란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죽을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무방비하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심지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실존적인 문제인지를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답이 없다. 결국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 사람에게 절대적인 네 가지의 진리가 주어져 있음을 기억하라 : 1. 모든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2. 나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오늘이라도 죽을 수 있다). 3. 나는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을 것이다. 4. 누구도 내 죽음을 대신하거나 함께하지 못한다. 이 진리를 가슴으로 받아들인 자는 "눈을 뜰 것이다."


나아가 존재의 수직선에서 일정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상위 차원"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부활", "깨달음"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것이다. 자아까지는 "내가 주인"이라는 능동태의 죄성이 살아 있지만, 순수의식으로 나아가는 순간 "나"라는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착은 사라지고, "나"는 총체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수동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이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게 되는 순간, "신성한 수동태"가 이루어지며, 이때 부활 이전의 영은 여전히 "내가 주인"이라는 착각이 있지만, 부활 이후의 영은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는 통로"로 새롭게 태어난다. 즉, "나" 그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나는 다만 통로로써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흐르시고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게 되며, 그분이 나를 통하여 흐르실 적에 나 역시도 "온전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상위 차원으로 나아갈수록, 수동태에 익숙해져야 한다. "내가 꿈을 통제한다"가 아니라, "영과 영혼이 꿈을 통하여 드러난다"에 가깝다. 즉, 여전히 "시점" 자체는 자아(ego), 곧 1인칭 시제이다. 나는 나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이제 "최종 주인"이 아니며, 자아 위로 까마득히 더 많은 "상급자"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며, 그들의 위계 안에 공식적으로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깨칠 때, 상위 단계가 열릴수록 참으로 기묘한 경험들을 많이 한다. 예컨대, 나는 자아로서는 제대로 된 신앙, 교리, 신학 공부는 전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심지어 성경마저도 제대로 안 읽었지만, 나는 지금 즉시라도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강의하고 수업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애초에 내 능력이 아니다. 내가 지식이나 학문을 공부하고 노력하여 얻은 것 자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자아로서의 나는 여전히 어두움을 두려워하고 어두움 안에서 불안해한다. 그러나 나의 영이 하나님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낼 적에, 오히려 어두움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내 안에서의 고유한 그 자각, "담대함"과 "영광"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법한, 그러한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여전히 나는 나다. 그러나 그 일들은 "자아가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만큼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다.


결국 상위 단계로 나아갈수록 언어, 지식, 관념은 점점 무용해지고 쓸모가 없어진다. 언어는 기초 단계일 뿐이다. 젖먹이 단계에서 영원히 머무르는 인간이 아무도 없듯이, 그리고 젖먹이는 가급적 허용된 짧은 시기가 지나면 금방 떼는 것이 낫듯이, 지식에 관해서도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더 쓰자면 끝이 없지만, 지면상의 한계로 오늘은 연금술 상징에 좀 더 집중하기로 하자.




연금술의 3요소는 영(spirit), 혼(soul), 육(body)이다. 이와 관련하여 램스프링의 서의 유명한 도상이 있다. 가운데 바다를 끼고서 왼쪽에는 숲이, 오른쪽에는 성(城, 왕국)이 있으며, 바다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방향을 교차하고 있다. 한 마리는 숲에서 성으로 나아가며, 다른 한 마리는 성에서 숲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바다 저편에는 항해하는 배 한 척이 있다. 숲의 하늘은 맑으며, 성의 하늘은 흐리고 먹구름이 꼈다.


이 상징은 매우 직관적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연금술에서 중요한 것은 몸(body)이 아니다. 연금술의 핵심 상징은 바로 영과 혼이다. 그러나 이전 글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위에서 이야기한 존재의 수직선 중 지상의 삼위일체의 영(Spirit)과 영혼(Soul)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지상의 삼위일체로서의 영과 영혼을 언급할 때는 영어 대문자로 첫 글자를 표기(Spirit, Soul)할 것이고, 연금술에서의 영과 혼 개념을 언급할 때는 영어 소문자로 첫 글자를 표기(spirit, soul)할 것이다.


연금술에서의 영과 혼은 위계적 개념이 아니라 수평적, 상호관계적 개념에 가깝다. 음과 양, 어두움과 빛, 남성성과 여성성...... 처럼,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원성이 교류하면서 하나의 통합된 실재를 만들어가는 그러한 이원적, 근원적 요소인 것이다. 다만 영은 혼으로 나아가며, 혼은 영으로 나아간다. 즉, 양자는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 물체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한 "에너지"이자 상징이고 원리이며, 이것이 유기적으로 서로를 향하여 흘러가면서 다양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때 영을 "왼쪽" 방향의 숲으로 배치한 것은, 숲이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상징성, 그러니까 자연, 원초, 순수, 본질, 형이상학, 철학, 에너지, 정신...... 등을 뜻하며, 반대로 혼을 "오른쪽" 방향의 성으로 배치한 것은, 공유, 확장, 보편, 일반, 현상, 물질...... 등을 뜻한다. 즉, 영은 순수/자연/원초이고, 혼은 공유/확장/보편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색과 공의 이원성과 거의 유사하다(물론 엄밀히는 근거한 개념 자체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대개 "영혼"이라고 뭉뚱그려서 부르지만, 연금술에서는 이를 엄밀히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영의 순수성과 이상, 본질, 자연, 원초, 에너지, 정신...... 등은 혼, 즉 보편적으로 이를 공유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운동성을 지닌다. 또한 반대로 내 안에서 혼의 보편, 일반, 공유, 문화, 상식, 개념...... 등의 성질들은 "보편적인 것 가운데에서 특수한/본질적인 것을 찾고자 하는" 운동성을 지닌다. 이 두 가지의 운동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가장 특수하고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구현된다"는 이상과 현실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연금술에서 영과 혼은 단순히 질료로서의 에너지라기보다는,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상징, 원리, 법칙 등을 두루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원리인 셈이다. 이것이 또한 연금술의 4원소로 확장되어, 원소라는 것은 과학적인 개념, 즉 "물질의 최소 구성 단위"로서의 원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를 형성한 재료/근거로서의 물질보다 더 높은 "(영적)에너지/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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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전에 내가 수업을 진행할 때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자료의 일부이다.


즉, 연금술에서 영은 흔히 말하는 순수라기보다, 인간성이 배재된 원초적인 본질, 형상, 형이상학에 가깝다. 그러한 영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혼이라는 질료, 매개를 필요로 한다. 반대로 연금술에서 혼은 인간성, 그러니까 집단성, 보편성,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여 구축된 일반, 상식, 개념, 문화...... 등을 두루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과 일반성에 함몰되면 "나"라는 특수성을 상실하게 되며, 따라서 혼은 필연적으로 영(이상, 본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금술 상징을 기막히게 표현한 애니메이션이 바로 겨울왕국 2편이다. 거의 사실상 연금술 기초 상징의 교보재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장 훌륭하게 이를 표현한다. 작중 엘사는 영을 상징하고, 안나는 혼을 상징하며, 엘사의 공간은 "마법의 숲"이고 안나의 공간은 "아렌델 왕국(성)"이다. 또한 스토리는 1편에서 엘사가 방황 끝에 성주(城主)가 되는 것으로 끝나며, 이 자체가 2편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엘사가 성을 떠나서 본래의 자리인 숲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안나가 언니의 뒤를 이어서 진정한 왕국의 주인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엘사와 안나가 서로 손을 마주잡는 대목에서, 엘사는 왼쪽, 안나는 오른쪽에 배치되는데, 이 구도는 작중 내내 거의 변화 없이 유지된다. 즉, "방향"이라는 명확히 의도된 상징이 쓰인 것이다.


연금술에서, 영과 혼이 하나가 된 것이 "신의 숨결", 에테르이며, 그것이 1차로 분화되어 영과 혼이 되고, 2차로 분화된 것이 바로 4원소, 불(Fire), 물(Water), 공기(Air), 흙(Earth)이다. 정확히는, 영에서 분화되어 불과 공기가 되고, 혼에서 분화되어 물과 흙이 되는 것이다. 이때, 불/물은 순수한 영/혼이며, 공기/흙은 순수한 영/혼이 현실에서 "응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응용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이어서, 나는 "현실화"되었다는 표현을 더 사용한다. 즉 순수한 본질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분화한 것이다. 예컨대, 물을 순수한 감정으로 친다면, 흙은 그러한 감정/정서가 "보편화"된 어떤 가치, 자원 등인 것이다(금전적 가치도 결국 '보편성(같은 가치를 공유함)'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방향성", "운동성"인데, 영/혼은 그 자체 독립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영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타로의 코트 카드 16장은 바로 이 영과 혼의 운동성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보자. Page of Wands 카드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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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물은 "정면으로 몸을 돌려서" 정직하게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방향성은 곧 영 → 혼을 상징하며, 이는 완드, 즉 철학/형이상학 등과 관련하여, "순수한 이상/본질을 세상에 공유/확장하려는 것"이라는 이 카드의 핵심 상징을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이 카드의 기본 키워드, "소식", "소식을 전달하다", "전달자(메신저)" 등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오쇼는 이 카드를 "놀이"로 배치했는데, 이것은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불의 원소는 감정이 아니라 정신(Spirit)이다. 따라서 기쁨이란, "~해야만 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의 의무/책임 중심의 두려움의 의도가 아니라, 그의 정신 자체가 자신의 순수한 의지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실행하는 것, 즉 의무/책임의 반대, 즉 "(정신적)자유"로써 행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오쇼는 "토너먼트 경기"를 예로 드는데, 누군가는 1등을 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패배하게 되는 그러한 구도 자체가 폭력적이며, 이는 곧 "성과지상주의", 즉 결과만을 얻기 위하여 집착하는 어두운 의도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등수를 메기지 않고 순수하게 "경기 자체"를 즐기는 의도는, 곧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완드 자체가 "의지(를 구현하다)"가 되며, 이 의지가 "~해야만 한다"는 의무/책임 중심의 두려움의 의도가 아니라, "온전한 의지를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영/혼 개념과, 불/물/공기/흙의 4원소의 개념, 그리고 영과 혼의 방향성의 개념들을 기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면, 코트 카드 16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보통의 일반적인 오쇼젠 타로의 표면적인 해설 그 이상의 영적인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본편을 위하여 아껴두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신앙은 실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해지려면 식단도 관리하고 운동도 하고 삶의 전반적인 것들을 실제로 조율하고 고민하고 연구하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지, 건강에 대한 지식만 머릿속에 집어넣고 집에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라는 것은 "영과 영혼과 의식"이라는 나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몸"의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때의 회복이란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셨던 순수한 형상"으로의 온전한 회귀, 완성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나"의 구조에 대해서 이해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어떻게 나의 "보이지 않는 몸들"을 조율해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실재적인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내가 스스로를 "실천적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를 넘어서, 영적 실재를 실제로 체험하고 교감하면서 그 과정에서 실재적인 영혼의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지금의 시대에서 종교가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복음의 이상 그 자체라고 믿는다.


이로써, 코트 카드를 통해서 그 구체적인 길을 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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