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2번 : 가능성]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구름 5번 : 비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메이저 2번 : 내면의 목소리]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엡6:10)
이번 주의 메시지입니다.
사람의 존재는 크게 세 가지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치 지구의 내핵, 외핵, 표피처럼, 수직적으로 이루어진 여러 층들입니다. 그 층들은 깊은 곳으로 갈수록 점점 더 "지배력"이 강해집니다. 인간 존재의 세 층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표피(마음) : 불안
2. 외핵(자아) : 두려움
3. 내핵(무의식) : 공포
사실 언어나 말은 어떻게 쓰든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 집단의 거대한 어두움이 무의식의 공포로써 강력한 지배력을 형성하고, 이것이 개체의식, 곧 "나"라는 자아를 지배하며, 이 모든 것들이 스크린에서 재생되듯이 현상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 공포, 불안은 하나의 "어두움"의 진동, 공명으로 정렬되어 있습니다.
기도나 묵상, 명상 등이 깊어질 적에, 그것들이 하나의 주파수를 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아의 구조는 어두움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는 것이며, "내가 한다"의 능동태는 결국 자아의 구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어두움을 끝없이 강화하는 결과만을 낳는다는 것을 곧 명료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 존재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이라든가 비판적 관점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가능한 왜곡 없이 그대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내가 불안할 때, 그것은 자아의 두려움에서 근거한 것이며, 자아의 두려움은 곧 인류 집단의 거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 구조를 알면서도,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은 쉽사리 어두움에 지배당하고는 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개닫지 못하더라."(요1:5) 가장 깊은 어두움은, 어두움 자체의 현존이 아니라, 이미 어두움에 집어삼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자기가 "정상"이고 "완전하다"고 믿는 상태입니다. 곧, 교만이지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류가 매트릭스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정작 그 세계가 현실이라고 믿는 무지, 무명, 어리석음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지란 "빛이 비추어지지 않은 상태", 즉 "원래는 환하게 밝았으나 아직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자체가 빛으로 비추어 밝혀질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걸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긍정적 측면입니다. 신은 상태가 아닌 의지를 보시니까요.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인류의 원죄는 바로 "의지(will)"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매트릭스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상태, 오히려 매트릭스 세계 안에 안주하려고 하며, 현실세게보다 매트릭스 세계가 더 좋고, 더 옳고, 더 높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가짐, 내면의 의도, 의지의 방향성, 그것이 곧 죄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창3:9) 뱀에게 꼬여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담을 짚어서 이와 같이 질문하셨지요. 굳이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이야기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상식일 터이니, 본론으로 들어가서, 아담의 죄는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행위로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이것은 같은 선한 행위로서 반성하고 뉘우치고 죄를 갚고 책임을 다하며 충분히 상응하여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그 행위의 기저에 숨은 "의도"입니다. 설마하니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를 "몰라서" 이와 같이 질문하셨겠습니까. "너의 모습을 보라"는 의도에서 질문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숨은 행위는 세 가지의 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 첫째, 내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의 죄, 둘째,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고 벌주실 것이라고 단정지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대로 판단한 오만의 죄, 셋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부한 공포의 죄입니다. 아담은 그 순간, "내가 숨으면 하나님도 나를 못 찾겠지",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그분은 당연히 날 벌주시고 지옥에 보내겠지", "하나님이 두렵고 무섭고 공포스럽다, 그러니 도망쳐야겠다" 하는 세 가지의 죄를 연달아 지은 셈입니다.
행위가 아닌 마음이 본질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상태가 아닌 의지의 방향성이 중심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6:7) 상태에 머무르는 순간 그것은 죄가 됩니다. 그러나 상태가 어둡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되 정체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빛을 향하여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려고 하는 "빛을 향한 의지"를 품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마음가짐이 됩니다.
마음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주의적 사고에 길들여진 사람의 전형적인 개념적 오류입니다. 육적인 몸조차도 미시적으로 보면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약 4개월이 지나면, 사람의 육신의 세포의 80% 가량은 새로운 것으로 교체됩니다. 즉, 4~5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육신의 구성 성분상 과반 이상이 다른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고정된 상태"라는 것은 인간의 감각 경험이 인간의 의식과 정신을 지배하는 열등한 정신 구조로 인한 망상일 뿐입니다. 진정한 "존재"는 곧 에너지, 흐름, 구조, 밀도, 방향성입니다. 더욱 섬세하게는, 진동, 공명, 파동입니다. 더욱 깊은 근원은 "빛"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인간의 육신의 몸조차도 이러할진대, 마음과 자아라는 보이지 않는 물질적인 몸은 어떻겠습니까. 마음은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마음은 매 순간 흘러가고 변화하고 작용하는 그 흐름과 현상의 명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성이 실체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곧 마음의 상태 자체를 억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애초에 칼에 찔리면 피가 나고 고통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물며 부정적인 사건이나 상황이 일어나면 마음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의 작용입니다. 이것을 억제할 수 없으며, 이는 우리들보다도 하나님께서 더욱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당연히 달리 이해되어야 합니다. "두려움의 의도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주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 주의 의지는 언제나 선하시고 기쁘시고 온전하심을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의지"이며, "두려워하지 않음"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리는, 어두움은 상태가 아닌 의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특정한 상태가 어두움이 아니라, 나와 타자와 세계 전체를 어두운 방식대로 인식, 분별하고, 억압, 통제하려고 하는 어두움 중심의 존재 방식, 사고 방식, 태도, 마음가짐...... 어두움의 구조 자체가 바로 진정한 어두움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을 언제나 들여다보며, 마음이 어둡더라도 내 의지만큼은 어두움에 속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두움이 아닌 빛이 나를 통치하고 다스리도록, 내 마음의 방향을 언제나 태양을 향하여 열어야만 합니다. 마치 해바라기처럼 말입니다.
마음의 구조에서, 진정한 평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서는 "휴전"만이 존재합니다. 무의식의 두려움, 공포, 불안은 마음으로 하여금 "자아와 타자와 세계를 통제, 억압"하도록 만듭니다. 불안하니, 자신과 자기 바깥의 모든 존재, 현상, 사건들을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방식/기준대로" 완벽하게 통제해야만, 그것이 진정한 평화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끊임없이 자기를 통제하고, 타자를 통제하고, 세계를 통제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은 자기 마음 하나조차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바, 타자와 세계는 더더욱 자기 마음대로 통제되지도 순순히 억압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마음은 "통제되지 않은 상태"라는 불안과 두려움, 공포의 흐르모가 에너지에 따라서 흘러갑니다. 마음의 차원에서는 "자기와 타자와 세계가 잠깐 동안 내 마음대로 통제가 된 것처럼 보이는 일시적인 상태"만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휴전이죠. 일시적 평화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삶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화하며, 한쪽이 통제되면 다른 쪽에서 문제가 터지기 마련입니다. 원래 빛과 어두움은 상호관계성이므로 우주는 균형을 유지하려 하거든요. 한쪽에서 통제가 되면(억압), 다른 쪽에서 반드시 문제나 사건이 터집니다(분출).
이 마음과 자아의 어두움의 구조는 "이원성의 구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빛과 어두움을 분리하고,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고,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고...... 그리하여 자아/주관은 열등한 것이고 타자/객관은 우월한 것이라고 믿는 열등감, 죄의식이 곧 지식과 앎에 대한 집착, 욕망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교만을 낳고, 교만이 다시 욕망을 낳으며, 욕망이 괴로움을 낳고, 괴로움이 다시 어두움의 억압, 증폭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음은 애초에 분열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공포는 "분리된 상태"이며, 따라서 공포는 망상일 뿐입니다.
왜 공포가 망상인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은 "창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1:3 등).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말하면, 또다시 어리석은 사람들은 창조론과 진화론을 들고와서 무의미한 논쟁을 벌이려 들겠지요. 이것만 보더라도 인간의 죄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무조건 분리하고 나누려 듭니다. 그리하여 우월한 것 하나를 남기고, 나머지 열등한 것을 전부 다 죽여 없애려고 들죠.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사람은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A or B : 인간의 죄성적 사고
A and B :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 방식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히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셨습니다. 이것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됨"은 애초에 개념적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신성 안에서 "분리된 이원성의 완전한 통합"이 일어난다, 고 이렇게 개념적으로 서술할 수야 있습니다만, 애초에 개념이라는 것이 "A = B"와 같은 식으로 존재와 사건과 현상을 "고정"시키려 드는 의도이며, 이 자체가 A = (B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과 반대되는 B"라는 이원성의 분리와 대립과 갈등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언어입니다. 인간은 "분열"시키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1등을 남기고, 나머지 모든 것들을 죽여 없애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동물입니다. 그만큼 인류 집단의 거대한 무의식적인 어두움, 곧 공포가 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아닌 나머지 자연의 존재들은 모두 다 빛과 어두움의 질서와 조화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비록 동물들이나 식물들도 탄생하고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만, 그들에게는 인간과 같은 특별한 공포가 없으므로, 아이러니하게도 특별한 기적도 은혜도 없습니다. 적당한 두려움과 적당한 평화 속에서 살다가 죽죠. 물론 그것이야말로 축복 받은 삶입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태초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씨앗(영)을 그 안에 심기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양질의 토양, 곧 특별한 어두움이 필요한 법입니다.
결국, "공포(어두움)로부터 환희(빛)로 나아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애초에 "내 힘"이라고 할 때의 그 "나" 자체가 어두움에 의해서 구조지어진 존재(자아, 개체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더럽혀진 손으로는 아무리 바닥을 열심히 닦아봤자 유감스럽게도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바닥은 더 더러워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두려움, 공포, 불안으로 구조지어진 자아로는 마음을 아무리 닦아봤자 점점 더 두려워지고, 공포스러워지고, 불안해져만 갈 뿐입니다. 적을 제압하려 할수록 적은 점점 더 교묘해지고 교활해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마음의 일시적인 평화"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내 마음의 일시적인 평화는 문자 그대로 "눈 앞의 어두운 사건, 현상들을 일시적으로 통제한 상태"로서의 평화일 뿐이며, 이는 "언젠가는 반드시 흘러가고 변화하여 사라질 일시적인 평화"일 뿐입니다. 마음의 차원에서는, 평화로울 때는 언젠가 이 평화가 사라질 것이므로 불안하고, 또한 어두울 때는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들이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느끼므로 또한 불안한 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수없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10:30)고 말씀하셨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10:38, 요14:10-11, 요17:21 등)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하나됨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내가 아버지와 하나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승천하여 아버지와 하나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임을 믿으라"고 하셨고, 이 말씀 자체가 곧 "처음부터 아버지와 내가 하나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분의 신성입니다.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분"으로서의 하나됨의 절대적인 신성입니다. 그 하나됨 안에서, 그리고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신성은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분의 신성은 믿는 자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현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당연히 그러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인 것이고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전제로 한 불완전한 것이지만,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분 자신께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바로 그 하나됨의 절대적인 신성 안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여 주시겠다, 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것은 외아들께만 허락된 위대한 하늘의 영화로운 특권이셨으나, 그분은 이것을 혼자서만 독점하기를 원치 않으셨고, "나를 믿기만 하면, 내가 너희 안에서 모두 아버지와 하나되게 하겠다"며 우리를 그 하나됨의 길 안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초대장"인 셈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위대한 "가능성"이 우리 안에 열림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결국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그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놓여 고통받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무의미하고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 부질없는 인간 존재의 불안과 공허라는 어두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창세 이전부터 계셨던 창조주, 절대자께로 이를 수 있는 길, 그것도 모자라서 바로 그 창조주, 절대자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며, 내가 "살아서" 아버지의 아들로써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 이토록 경이롭고 고귀한 것을 그저 "그 이름"을 믿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누구라도 예외 없이 다 얻게끔 열어놓고 또한 이루어놓으셨다는 것이, 어두움의 한가운데에서 완벽한 절망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빛을 부르짖은 자에게 얼마나 큰 구원의 "가능성"이 되는지는, 알만한 사람들만 알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두렵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본래 어두움에 지배당하도록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있었기에, 그 이원성의 대립과 분열로 말미암아 공포만이 남았더라면, 이제 그분과 내가 하나되었기에, 나는 인간으로서 어두움을 내어드리고, 그분은 빛으로써 내게 임하사 그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니, 그분과 내가 손을 잡고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밝히는" 아버지의 가장 위대하신 뜻을 함께 이루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할진대, "그분이 나를 이끄시는 기쁨"이, "어두움에 빛이 비추어 밝히어지는 평화"가, 내 영혼의 깊은 층위에서 영원히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분과 하나되었다 하더라도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믿음의 결심은 단 한 번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사건이지만, 그만큼 나의 어두움이 깊었기에, 그분께서 나의 손을 잡고 함께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는 성화의 과정은 앞으로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가야 합니다. 설마하니 한 번 믿었다고 모든 것이 한 번에 다 해결될 것이라는 편리하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구원받았다 여기는 건 아니겠지요? 가능성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평생의 삶. 그러나 이전과는 다릅니다. 이전에는 아무리 길을 걸어가봤자 결국에 공허하고 허망한 죽음과 사망만이 남았더라면, 이제는 그분께서 나의 손을 잡고, 또한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실 것이기에, 내가 이 길에서 값을 치르는 슬픔과 눈물만큼이나 내 영혼이 성화되고, "아버지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성장과 변화와 완성이 이루어질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그분 안에 거하시는 "완전한 평화"로 인하여, 이제야 "살아 있음"이, 삶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살아도 죽느니만 못한 무의미한 삶일 뿐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바깥의 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전에는 내 안에 진리가 없었기에, 끊임없이 바깥이 주는 진리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부모가, 사회가, 국가가, 세계가, 나아가 인류 집단 전체가 형성한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에 대해서 규정한 상식, 지식, 관념, 전통...... 그러한 것들에 끊임없이 자기를 비교하고, 맞지 않는 부분들을 억제하고 억압하고 통제하고 제거하려 들었습니다.
세상의 법(法), 세상이 정한 옳고 그름의 인식과 분별의 틀이 자신에게 맞지 않을 때, 그 법을 탓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내가 잘못되었다, 내가 틀렸다, 나는 이 세상에 없어야 할 존재다"며 끊임없이 자기를 억압하고 단죄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이제, 세상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경이롭고 고귀하신 분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그분께서 실제로 내 안에 살아 계시며, 때때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말씀하시고, 또한 용서하게 하시고, 또한 축복하게 하시며, 가장 위대하고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되, 나를 배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 같은 더러운 손을 잡아 이끄셔서, "굳이" 내 손으로 그분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더 이상 세상과 타자와 나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예비되어 있고, 내 안에 죽음마저도 넘어서는 영원한 진리가 숨쉬며, 내 안에 영원히 그분과 하나되어 살게 할 생명이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또한 그분이 나를 사랑하며, "우리가" 함께 그 하나됨 안에 거하여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고, 또한 나는 그분을 통하여 온전하고 선하고 기쁘신 모습으로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니, 그 안에 더 이상 비교는 없습니다. 이제 세상의 기준이 나를 단정할 수도 단죄할 수도 억압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내가 세상에게로 나아가서, 그분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어 밝힐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내 안에 어두움이 가득했으니 끝없이 빛을 끌어당기고 채워넣으려고 아등바등 발버둥쳤습니다. 남의 빛을 하나라도 더 빼앗아서는 내 안에 끝없이 소유하려고 집착하고 욕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안에 영원하신 빛이 계시니, 더 이상 빛을 더 채워넣는 것은 무의미하며 오직 "나를 통하여 그분의 빛을 세상에 은밀히 나누고 공유하는 것"만이 내 삶의 유일한 기쁨이 되었습니다.
능력을 구하고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베풀어주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니, 내 안에서 그분께서 나를 이와 같이 바꾸셨습니다.
이제 세상의 법이 나를 다스리지 아니하며, 그분의 의지와 말씀만이 나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틀린지를 비추어 밝히시고, 나를 언제나 그분의 의롭고 고귀하고 선하신 뜻대로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또한 나로 하여금 무의미하고 허망한 내 공포와 욕망대로 흔들리게 하지 않으시되 때마다 나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의로운 목적대로 살도록 손을 잡으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내 의지, 내 능력, 내 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되는 순간, 또 다시 나는 어두움 안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전구가 전기 없이 혼자서 빛을 낼 수 있다고 믿으며, 전구가 스스로 전선을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구가 전기에 의지하는 것은 열등감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전구가 전기 없이 홀로 빛날 수 있다고 믿는 생각 자체가 이상한 망상이지요.
이와 같은 모든 의지와 능력과 힘은 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열린 눈, 열린 귀입니다. 그분의 존재를 느끼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분의 뜻에 따라서만 느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신성한 수동태"의 감각을 언제나 유지해야 합니다. 순종이 우리의 능력이요, 믿음이 우리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감각은 오직 사랑으로 인해서만 발달합니다. 세속에 대한 욕망을 사랑하기보다는 그분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사랑하며, 비록 세상을 잃어버리더라도 그분과 더 가까워지기를 소망하는, 그러한 순결한 사랑만이, 그분의 음성을 더 예민하게 듣도록 우리의 영혼을 발달케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보이는 것에 대한 감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되, 보이지 않는 그분의 음성, 내면의 목소리에 의지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하여, 내면의 승리자가 되십시오.
"내가 한다", "내가 해야만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의 능동태의 함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다"의 능동적 수동태로, 전기가 전구 안에 흐르매 전구 혼자서는 빛날 수 없으나, 전기로 말미암아 전구가 환히 빛을 내는 것과 같이.
이 단순하지만 위대한 비밀을 깨닫는 자는,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