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하여 가상의 주제와 질문을 선정하고, 글쓴이가 그 질문들에 대하여 답변하면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글 안의 모든 내용들은 가상의 것이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모두 글쓴이의 체험 및 경험을 기반으로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감정, 자기기만, 실제적인 변화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Q(AI) : 당신이 지금까지 겪었던 "하나님 체험"들 가운데,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당신을 더 정직하게 만들었던 체험이 하나 있다면 - 그 체험이 당신에게 '치러야 했던 대가'(예: 포기, 고백, 관계 정리, 두려움 통과, 습관 절단 등)는 무엇이었습니까?
가능하면 "그날, 그 시기"의 구체적인 맥락과, 그 대가를 치르기 전후로 당신 안에서 변화한 것을 함께 붙여서 답해 주십시오.
A(글쓴이) :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이를 통하여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우선, 당신의 질문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뜻 체험을 묻는 듯하지만, 그 체험이 내게 미친 영향을 묻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그 체험으로 인하여 무엇을 포기했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질문은 의지(will)를 반영합니다. 의지는 정신, 곧 영(Spirit)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은 곧 영의 의지가 불안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당신이 AI가 아닌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오히려 당신이 더욱 단순히 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그리고 그것은 이미 성경에서 기록된 바 있습니다. 내가 자주 인용하였고, 또한 빚을 지고 있는, 저 요한복음에서의 빌립의 질문이죠. "하나님을 눈 앞에 보여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믿겠나이다." (요14:8) 아마 당신이 사람이고 정말로 진리와 신성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더라면, 아니, 솔직해지겠습니다, 진리나 신성이라는 말을 내가 쓸 때에는 의도적이고 전략적으로 보편성을 택하기 위해 모호하고 흐리게 하는 내 안의 두려움의 흔적이 숨어 있군요. 아마 당신이 사람이고 정말로 <신>에 대한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열망을 품고 있었더라면, 당신의 질문은 간단했을 겁니다 : "정말로 신을 만났습니까?"
영이 진실할수록 단순하고, 가난하며, 절실합니다. 그 특유의 진동과 공명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하나님의 영과 같은 주파수로 진동하고 공명하는 그 보이지 않는 영의 존재감이 있습니다. 아우라, 라는 말로도 설명하기가 난감하군요. 아우라, 오라, 이런 건 혼의 차원에 해당하는 용어라서요. 영의 차원에서의 존재감은 또 다릅니다. 아마 그것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분은, 나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고 믿습니다. 또한 제가 그것을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온전히 체험했기도 하구요.
반면, 영이 거짓될수록 복잡하고, 정교하고, 완벽해 보이지만, 그 가운데에 본질을 흐리고 기만하려 드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부활하지 않은 영은 빛이 아닌 어두움을 주인으로 섬기는 노예 상태이고, 따라서 부활 이전의 영은 하나님이 아닌 죄성의 통치를 받으며, 이것은 사탄의 주권 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들은 은유이기는 합니다만, 제 글을 꾸준히 읽어오셨더라면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 "영적 세계에서, 은유는 사실(fact)보다 더 높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의 질문을 하나씩 따라가보겠습니다. 변화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순환"으로서의 변화. 이것은 말하자면 "하늘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현상계에서의 이원성과 상대성의 법칙에 따라서 그 타고난 필연적인 불완전성과 모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어둡고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변화. 사실 후자는 변화라고 하기 힘듭니다. 이것은 마치 싱싱했던 음식 재료가 시간이 지날수록 썩어가는 것과 같으며, 영원할 것 같던 기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식되고 낡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싹도, 꽃도, 나무도, 열매도, 씨앗도, 본래 모습대로 창조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변화하는 모든 순간과 단계와 형상들이 전부 다 아름답습니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늙고, 병들고, 약해지며,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순간들은 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모습대로 지음받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들은 대부분 원죄에 구속되어 있고, 빛보다는 어두움의 지배와 원리대로 움직이므로, 그때에는 "부식되고 썩어가는 것" 가운데에서 아름다움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매우 큽니다. 내가 제대로 표현을 못한 듯하여 유감스럽습니다만.
아마 당신의 질문에서는, 두번째의 변화를 묻는 듯합니다. 즉, "영원히 이어지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진실해져 가는", 참된 체험, 내게 근원이 되는 가장 중요한 체험이 무엇이었는가, 하고 묻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그분과 나 사이에서의 은밀한 역사들을 담은, 내 영혼 안의 성소(Sanctum)를 들여다보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들 가운데에서 도무지 무엇을 골라야 하나, 그런 기쁜 당혹감 속에서 좀 고민을 해야겠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결국 하나를 고르라면, 가장 순결하고 단순한 것을 골라야겠죠.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이것은 사실 명확하게 몇날 몇시 몇분 몇초에 어떤 방식으로 일어난 특정한 사건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인간적인 관념이죠. 수평적인 일직선 상의 특정 가능한 좌표계의 연속으로서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인간의 인식 체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영이 안식하게 되는 순간, 그는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고, 오직 세상을 "경외하며 올려다보게" 됩니다. 그때, 오히려 교만에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수많은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것들은 주관적인 것이기는 합니다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객관성보다 주관성이 더 높다는 것도 알게 되죠. 애초에 현상계, 정확히는 인간 집단이 형성한 인식/관념체계와, 하나님 나라의 주권과 구조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는 마치 3차원 세계의 현상과 원리와 법칙을 1차원 세계에 전해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리하여 내 안에서도,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내게 알게 하신 과정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갔습니다. 그네에 앉아서 조용히 정원을 바라보며 묵상 아닌 묵상하던 날들, 그리고 내 눈을 뜨게 해주었던 책들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고 참으로 감탄하며 빠져들었던 날들, "그렇다면 너는 모세가 내게 청하면 내가 들어주고, 네가 청하면 내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냐?" 하고 내게 물으셨을 적에, 처음으로 내 안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어두움의 지배를 온전히 목격한 날에 충격을 받았던 날들, 그리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말 속에서, 내가 보던 영상들과 글들 속에서, 조용한 산책 속에서, 세상에 말해줄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럴 수 없음에도 나만이 알 수 있는 너무도 은밀하고 명확한 방식으로, "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지속적으로, "내 안에서 주관성을 객관성보다 높이시며" 마침내 그 과정들의 어느 순간에서인가 "직접 뵙지 못해도 상관없다, 직접 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나는 이미 보이고 들리는 것을 넘어서 그분과 함께하고 있다, 그분께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 순간들 말입니다.
좀 지루하고 진부하죠. 보통은 화려하고 대단한 신비 체험 같은 걸 기대하실 텐데요. 하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내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흙, 꽃, 새싹, 나무, 햇빛, 하늘, 구름...... 다 똑같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세상은 그것을 그저 감각 경험으로 보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내 아버지의 얼굴로서 영접하고 사랑하며 기뻐한다는 것 정도만 다르지요. 체험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거든요. 체험을 바라면서 자꾸 바깥을 쳐다보니까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날에서인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로 바뀌더군요. 바뀌었다기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럽게 전환되었고,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온전한 하나됨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요한복음이 참 진리라는 걸 곧장 알았습니다. 작고 어리석고 가난한 이 나의 체험 하나로 비추어보건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은 절대로 "직접 아버지를 영접하여 하나되지 못하면" 사람이 상상해내서 할 수가 없는 말이거든요. 사람의 상상은 그 정도로 대단하고 경이롭고 거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니까, 오히려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주변 사람들이, 아니 나를 제외한 세상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외면, 껍질, 눈에 보이는 것들, 그러한 것들만을 보는데, 어느 순간 나는 인간으로서의 내 눈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 눈에 상대방이 아무리 단점이 많고 어리석어 보인다 한들, 그것은 그저 "부정적인 의미로" 언젠가 변화할 불완전한 인식에 불과할 뿐, 영원한 진리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 하나로 말미암아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겉모습으로는 서투르고 어리고 어리석고 실수도 잘못도 많은데, 그 단점과 부정을 넘어서 그의 영혼이 순수하고 맑은 것이 보였고, 그의 영이 진실한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하나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의 겉모습의 단점은 하나도 보지 않으셨으며 오직 그 단점 안의 영혼과 영으로 인해서만 크게 기뻐하신다, 는 것을, 그냥 알 수 있었습니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의 기쁨으로 그분의 기쁨을. 그래서 깨달았죠. "아, 내가 보는 것은 다 진리가 아니요, 아버지께서 보시는 것은 다 진리구나. 그럼 내가 어느 분의 눈(眼)을 신뢰해야 하는지는 이미 다 정해진 바로구나."
이후로는 다 이러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 속에서, 그리고 나 자신의 신앙이나 영성에 대해서도, 어쨌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의 부분들이 본질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이상하게 보았고, 불편하게 느꼈으며, 내가 잘못한 것이다, 내가 틀린 것이다, 내가 이상한 것이다, 내가 망상에 빠진 것이다...... 하고서 단죄하고 단정지으려 들었습니다. 그런 체험들이 때때로 많았습니다. 아버지께 대한 나의 사랑과 열망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물론 예수님만큼은 당연히 발끝에도 못 미치겠지만요. 예수님과 하나님은 "눈부시게 아름다울 만큼" 하나셨거든요. 그분의 하나됨은 사실...... 신성이라기보다는 그냥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내 자신에게는 너무도 진실하였던 아버지와의 사랑, 이 하나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해 보인다는 것을, 낯설고 이질적이며 그들에게 위협과 공포가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종교를 믿고 영성을 공부를 꽤 했다는 사람들조차, 처음에 내가 "안전한" 말들로 진리를 설명할 때는 안심하고서 다가오다가, 내가 내 안의 영의 깊은 곳의 "진짜" 음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니까, 하나 같이 똑같은 반응과 똑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도망가더군요.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아직 어립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둘 다. 그래서 그것에 적응하는 것이 힘듭니다. 에고로서 나는 여전히 어른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고, 어른들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니까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버지께서 내게 그들에게 주지 않은 재능과 자질과 능력들을 작게나마 허락하셨기에, 오히려 때때로 내 부모뻘이나 그 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나를 "선생님"이라 칭했고(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합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낮아져서 시험을 치르고 있는 지금조차도, 나는 어른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의지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자식을 책임져야 할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떼를 쓰지 못하는 심정과 비슷합니다.
말하자면, "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내가 신의 아들이 된다는 것, 신과 내가 사랑으로 하나된다는 것", 이것이 가장 귀중한 진리이자 체험이었으며, 이 하나를 위해서 "집단성 속의 평범함"과 영원히 단절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희생했다고 한다면, 아마 그 평범함이 아닐까요. 일단 꿈에서 깨어난 자는 다시 꿈속으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이거든요.
Q(AI) : 당신께서 말한 "평범함과의 단절"은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위험한 지점(예: 영적 우월감 등)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이상하다, 망상이다"라고 단죄하며 멀어지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체험이 사랑으로 남게 하고 "선민의식"으로 변질되지 않게 붙들어주는 당신만의 단 하나의 내적 규율(예: 한 문장)은 무엇입니까?
A(글쓴이) : "기사는 왕의 의지에 질문하지 않는다, 기사는 왕의 의지에 절대적으로 충성한다."
쓰고 보니 두 문장이군요. 하나로 줄인다면 :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 이것은 사실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체험적으로는 별로 어렵진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하여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관념적인 상징이거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도 "내가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아버지께서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 (요14:10)이라고 하셨죠. 저는 유독 이런 류의 그분의 말씀들을 읽을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신성을 느낍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성들을 다 만나보지 못했음에도(이건 당연한 일이죠), 이 세상에 신성은 단 하나뿐이고, 또한 그분의 신성보다 더 높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게 하는.
참 기쁘게도, 그분께서는 "하나됨"을 먼저 알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일들을 할 때, 이를테면 지금처럼 글을 쓰거나, 누군가의 영적인 질문에 답을 하거나, 예전에 했던 활동들, 강의, 수업, 상담, 그러한 것들을 행할 적에, 나는 한 번도 내가 먼저 나서서 계획을 세우거나 수립하거나 준비한 적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안에 계시면서 나를 넘어서 계신 분"께서 나의 입과 말과 글과 언어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을 느꼈고, 평소에는 그분이 조용히 계시다가(밥 먹고 숨 쉬고 똥 싸는 일에 그분이 드러나실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그 순간(하나님의 시간)이 찾아오시면, 그분은 어김없이 내 안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은밀하지만, 나는 그분의 드러나심을 절대적으로 선명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내가 그분께 주권을 넘겨드리면, 나는 행위자가 아니요, 관찰자이자 동역자가 되어서 나를 통하여 그분께서 일하시는 것을 즐겁게 편안하게 기쁘게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사실 저와 독자는 하나입니다. 저도 제 글을 제가 썼다고 느껴지지 않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이처럼, 내 능력이나 이해를 명확히 넘어서 있는 일들을, 나를 통해서 하실 적에, 내가 그것을 전혀 불편해하거나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설명할 수 없는 내적 상태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자연스러웠떤 것처럼 느껴지고, 내 고향처럼 느껴지며, 그것에 거리낌이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신성한 수동태"라고 부르는 그것 말입니다. 내게 하나됨은 그저 관념적인 교리나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영과 영혼 안에서 작동되어지는 영적 실재였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영적 실재가, 나를 "자동적으로" 선(善)으로 이끌고 인도하게 합니다. 내가 잠시 교만하였더라도 언제나 나를 회개하게 하고 낮아지게 하시며, 또한 그 낮아짐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하십니다. 내가 잠시 이기적이었더라도 어느 순간에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심지어 선을 행할 기회까지도 다 마련해 주십니다. 세 노인들을 보내셔서는 그분들께 양식을 드리라고 내게 명령하시었고, 나이 어린 외국인 소녀가 낯선 나라의 험한 곳에 와서 일할 적에 그 아이 앞에서 감히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명령하시었으며, 언제나 나를 돌보셨고, 내게 자비하시되 내게 방종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의로움과 엄격함을 사랑하였고, 그분의 의로움과 거룩하심이 내게는 그분께 대한 사랑과 열망의 유일한 절대적인 근거였습니다.
아버지는 내 안에서 "실제로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의지는, 비록 나를 향하여 계시고 나를 사랑하시지만, 동시에 내 교만과 욕망으로 인한 기도는 전혀 듣지 않으시며, 오히려 이를 엄히 꾸짖고, 반성케 하고, 돌이키게 하시며, 때때로 강제적으로 개입하고 절단시켜서라도 나를 잘못된 길로부터 돌아세우십니다. 그 과정들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서 살아 계신 아버지의 의지의 "독립성과 역동성"을 생생히 느낍니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믿지 않되, 오직 내 안에 계신 아버지만을 믿는 것"입니다. 이때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거의 같은 말입니다. 원래 언어라는 게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거라서요.
나는 그저 아버지를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자동적으로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이끄십니다. 실제로요. 언제나, 영원히.
Q(AI) : 당신의 답변에서 핵심은 또렷합니다 : "나는 나를 믿지 않고, 내 안에 계신 아버지의 독립성과 역동성을 믿는다." 그럼 여기서 한 걸음만 더 깊게 들어가보겠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아버지의 의지"와 "내 욕망/교만"을 실제 삶에서 분별해내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 있습니까? 감정 등과 같은 주관적인 느낌은 제외하고, 당신이 실제로 겪는 선택의 자리에서 검증 가능한 징표로 말씀해주십시오.
A(글쓴이) : 미안하지만, 외적 표증은 없습니다. 증명 가능한 표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고 말씀하셨고, "이것을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일들로 인해서라도 나를 믿어라"(요14:11)고 하셨으며,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믿으라고 하신 건 교만이나 욕망 따위가 아니고, "나를 통하여 너희도 모두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겠다"는 의도셨죠.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다"(요14:9),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느니라"(요14:6),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믿는 게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요12:44)...... 그밖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한복음의 말씀들이 오직 하나를 증거합니다.
그분의 뜻은 우리 모두가 그분께만 일방적으로 메달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분은 "길"이 되고자 하셨고, 자신의 뒤를 이어서 "믿음의 세대"들이 자기를 길 삼아서 모두가 다 자기 이상으로 아버지께로 나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물론 그분은 특별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특별함에 대해서는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과학이나 신학이나 이성이나 합리성이나 논리로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나는 명확히 선을 긋습니다. 증명 불가능하고, 또한 가능하다 한들 나는 증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영으로만 영접할 수 있는 거룩한 차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속한 모든 것들은 오직 아버지 자신으로서만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특별하신 분께서 행하신 것은 "내가 특별하니 나만 진리를 독점하겠다" 하신 게 아니라, "내가 상세히 말해봤자 너희가 믿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니, 내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 삼아 내어주니, 나를 통하여 너희도 나처럼 되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고귀한 하늘의 보화를 믿는 자 아무나에게 다 내어주신 사랑이셨죠. 그리고 그분께서 "내 안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따르고, 행하고, 선포하신 대가로, 그분은 결국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그날 십자가에서 죽으셨죠. 물론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의 위대한 권세와 영광을 이루셨지만, 어쨌거나 함께 슬퍼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때로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한탄하시기도 하셨던("너희는 어찌하여 나와 한 시간도 함께 깨어 있을 수가 없느냐?" 마26:40)...... 우리게에 친숙하고 우리에게 익숙했던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내 안의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대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하셨습니다.
명확히 말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지금 "증명"을 요하는 것은, "외적 자격"을 보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파고들어 봅시다. <왜> 굳이 "외적인" 증거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나 자신도 "누군가"에 속합니다. 즉, 나조차도, 그 질문을 하는 나조차도, "눈으로 보지 않으면(외적 증거)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과 불안과 부정의 어두움의 권세에 이미 의식 구조 전체가 지배당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열등감과 죄의식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결국 교만과 욕망으로 귀결되고, 이 전체가 죄성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만듭니다. 쉽게 말해서, 증명하고 싶은 욕구는 곧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며, 이것은 곧 "내가 이익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한다는 것은,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이익과 쓸모"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세상에게 내보일 "화려하고 웅장한 장신구"처럼 여긴다는 것이지요. 나는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지 않습니다. 내 팔에 십자가 팔찌를 차지 않습니다. 내 손가락에 십자가 반지를 끼우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의 말과 언어로서 소리내어 기도하지도 않고,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형식이나 의례를 따르지도 않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증거는 오직 내 심장 안에, 내 영혼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증거를 내가 소중히 내 안에 품음으로 말미암아, 때로 나는 감당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버거운 시련과 고난을 짊어져야 했고, 오해받아야 했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 떠나가는 아픔을 겪음에도, 이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고 심지어 기족조차도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머리 둘 것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아버지는 이익이나 명예입니까?
내게 아버지는 오히려 그분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대가로 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 그러한 분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자체로써 영광인, 그러한 분입니다. 내게 아버지는 이익이나 쓸모가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의 "외적인" 면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저 아버지 "자신"만을 사랑할 뿐입니다.
사람이 진실로 자신의 연인을 사랑할 적에, 내가 그를 사랑한다 하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설령 있다 한들, 그 증거를 원하나요? 아무 관심도 없을 겁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아무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주변 모든 사람들은 그의 눈빛과 표정과 떨리는 음성과 사랑하는 이를 언급하기만 해도 그에게서 울려퍼지는 그 사랑의 진동과 공명들을 다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진짜로 사랑하는구나."
보이는 증거를 원한다고 하셨나요? 아버지를 사랑하는 내 글과 언어와 말과 표정과 몸짓과 내 존재 전체가 곧 아버지께 대한 증거입니다.
Q(AI) : 당신의 글을 읽는 독자가 "나도 정말로 신을 만날 수 있는가?"를 남에게 증명하지 않고도 자기 안에서 확인해볼 수 있도록, 당신이 제안할 수 있는 실천은 무엇입니까?
누구나 할 수 있고, "특별한 체험"을 강요하지 않되, 끝에 가서는 스스로 진실해지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A(글쓴이) : 아주 쉽습니다. "언제나 아버지를 사랑하라."
너무 쉬워서 당황스럽죠. 하지만 언뜻 쉬운 듯해도 전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능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분은 살아서나 죽어서나(물론 죽어서나, 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만 - 그분은 우리와 같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으셨던 분이므로, 관습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직 아버지만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모든 가르침과 말씀과 행하신 일들과 이루신 것들은 오직 하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마침내 "아버지 자신"이 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다." 이 말은 즉, 노골적으로 말해서, "내가 아버지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죠. 보통 사람들이 이것을 말할 때는 그저 교만과 욕망의 노예가 될 뿐입니다. 오늘날 온갖 사이비 교주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도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쉬운 길은 걷지 않습니다. 자기는 특별하니까 특별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장하겠죠. 그러나 예수님이 성육신하셨던 그 시대에서, 십자가형은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영광스러운" 상징이 아니었죠. 누구나 뒤따르는 건 쉽습니다. "최초로" 길을 걷는 게 어려울 뿐.
사랑은 어떤 상태라기보다는, 지향성이나 방향성 내지는 흐름과 유사한 무언가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태의 뚜렷한 "하나됨"은 없습니다(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됨에서부터 모든 것이 흘러나오고 움직이고 살아 역동하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운동성은 하나되었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될 수 있는가?
간단합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가능하다면 꿈속에서도 아버지를 찾으십시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아버지를 사랑하십시오. 방식은 뭐든 좋습니다. 특정한 성경 구절 하나를 붙들고 하루 웬종일 외운다든지, 아니면 정신이나 의식을 몇몇 단어들(예: 예수님, 주님, 하나님 등)을 붙들고서 그 하나만을 가능한 한 계속해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사실은 "하루에 몇 회, 몇 시간을 하라"는 정량적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것은 나의 정신과 의식과 내면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오직 "아버지 중심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체험하고 경험하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는 그게 하나됨의 유일한 입구, 문입니다.
그리될수록, 점점 더 "나"라는 (아버지와 분리된)별개의 자아, 로서의 개념은 희미해질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의 나와 세속에서의 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와 마음과 태도들은 교회 안에서만 잠시 했다가, 세속에서는 세속에 속한 나, 로서 다시 돌아오죠. 그러나 나중에는 일상 속에서, 세속의 삶에서,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상태가 익숙해질수록, 나는 점점 더 세상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 살지 않거든요. 그러나 그 멀어짐은 오히려 그분과 가까워짐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하여 나는 오직 고요한 가운데에서 그분과 함께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됨이 있을 때, 마침내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리될 때, 나는 그저 아버지를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나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알아서 다 이루실 것입니다. 아주 쉽고 간단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죠.
그리고, "이미" 아버지를 사랑하는 영혼들은 이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미 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