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공지능에게 무작위로 추출하도록 한 결과입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리고 세 장의 오쇼젠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에게 무작위로 추출하도록 한 결과입니다)
물 8번 : 내맡김 (Letting go)
무지개 4번 : 구두쇠 (the Miser)
메이저 10번 : 변화 (Change)
세 말씀의 직관적인 연결성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이해와 신뢰입니다.
오쇼젠 타로에서 물의 시종 : 이해(Understanding) 카드가 있습니다. 이것의 핵심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실천과 변화를 낳지 못하지만, 가슴으로, 영혼(Soul)으로 이해한 것은 곧바로 실천과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아, 나의 힘으로는 내 스스로의 어두움과 죄와 업과 까르마와 오랜 운명과 숙명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겠구나, 이것은 내가 발버둥쳐서 도저히 될 수가 없는 일이구나."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든 간에, 그 무의식적인 오랜 어두움에 깊이 사로잡히고 또한 그것을 깊이 들여다보고 감당하고 시험을 치르면서 지금까지 나아온 모든 영혼들은 내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해는 곧 실천을 낳습니다. 자기 안의 어두움을 진실로 마주하여 회심하고 회개한 자는 마침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실존적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참된 이해는 곧 실천을 낳습니다. 만약 이해했는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 정작 영혼으로는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성령께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본래 이해란 진리를 마주함이고, 진리는 곧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니, 주의 말씀을 들을 귀를 열어달라고, 내 영혼에게 참된 이해의 빛을 열어주시고 또한 인도해주시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 기도하던 어느 날에서인가, 마침내 영혼은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 한 음성이 결국 그의 영을 완전히 거듭나게 할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지성적 이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길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필요한 것이되, 본질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성으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오직 영혼으로 인해서만 변화합니다. 영혼으로 말미암은 이해는 힘이 강합니다.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끝내 믿음을 잃지 않게 합니다. 때로 세상은 에고(ego)보다 영혼을 더 신뢰하는 자들, 영혼에게 주권을 넘기며, 세상적인 상식과 관념과 기준으로 보기에 어리석더라도 영혼이 신뢰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신뢰하기로 선택한 자들, 곧, "믿는 자"들, 그들을 어리석다 하여 비웃고, 모욕하고, 조롱하기를 숨 쉬고 밥 먹듯이 할 것입니다. 혹여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반드시 그리할 것입니다. 그러한 시련 앞에서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버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에고의 교만의 죄의 최후의 목숨은 오직 셋이니, 첫째는 수치심이요, 둘째는 억울함이며, 셋째는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품은 가장 순결한 의지와 믿음이 남들에게 오해받는다는 것, 그것은 교만의 죄의 세 요소를 전부 다 포함합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가 이토록 진실한데도 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에 대한 억울함, 그리고 창피당하고 모욕당하는데 대한 수치심. 나는 처음부터 나의 어두움을 내 능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서 이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믿음이란 선택의 여지가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영혼이 죽음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하나밖에 없는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세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도우시며, 나를 이끄신다는 것."
비록 온 세상은 나를 능력 없다 하여 버리고, 힘이 없다 하여 버리더라도, 그분만큼은 내가 능력이 없을수록 더 나를 보호하시고, 내가 힘이 없을수록 더욱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온 세상은 기어코 나를 버릴지언정, 내 영혼이 진실로 믿는 그분은 세상 끝날 때까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 이것이 그분의 "도우심"입니다. 이것은 그저 개념적 상상이나 감정적인 느낌 따위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과는 다른, 영과 영혼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실재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그 방식에서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이것에 대한 참된 이해입니다.
사실, 이 세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유명한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말씀들 속에 감추어진 본질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결국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정확히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첫번째 말씀은 구체적으로 "성령의 증언으로 내 안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복음의 진리로써 작동됩니다.
세 말씀들 어디에도 겉으로는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말씀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그 손길은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서 현현하시는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말씀 역시도 결국 그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우리로써 알게 하시는 분이 우리 안의 그리스도이심을 암시합니다. 세번째 말씀 역시도 결국 우리를 아주 세밀하게 살피셔서 우리의 필요를 때마다 맞춰 제공하시고 또한 시험을 이어가게 하시는 분 역시도 그리스도이심을 암시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암시라기보다는 신앙인에게는 당연히 자연스럽게 이와 같이 읽혀져야만 합니다. 실제로 내가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과 함께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며, 나를 통하여 이루신 그분의 역사들과 교감하는 그러한 모든 보이지 않는 영과 영혼의 일들은 전부 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나는 여전히 그것에 대해서 모릅니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내 능력으로 이룬 일이었더라면 내가 바라고 원하고 소망하는 것들을 이루고 성취하는 방향으로 가야만 하는데, 그분의 신성과 교감하며 그분과 하나되어 함께하였던 나의 모든 시험의 여정들은 한결같이 일관성 있게 '내려놓고, 떠나보내고, 낮추고, 받아들이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거든요. 이 세상에 자기 소망을 포기하고 자기 뜻이 좌절되고 자기 바람이 낮추어지는 것을 즐거워할 인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내게 그것이 얼마나 간절한지, 내가 그 하나를 얼마나 바라고 원했는지를 그분께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은 내게 지금까지 끝없이 '내려놓고, 떠나보내고, 낮추고, 순종하게 하는 길'만을 걷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내 능력이요 내 힘이라고 확신하겠습니까.
애초에 신앙은 "내가 하는 것"(능동태)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그분께서 이루시는 것"(능동적 수동태)입니다. <그냥> 수동태는 죄성입니다. 주님께 죄다 내맡기고 나는 게으르고 나태하고 안일하게 엎어져 있는 거죠. 그러나 <능동적> 수동태라는 것은, 내 안의 어두움과 죄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그것을 직관하고, 마주하고, 통과하며,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오직 한결같이 그분의 신성만을 바라보고 가는 과정입니다. 순종의 본질은 "능동적"이거든요. 능동적 수동태,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지금은 내 눈으로 보기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절망적입니다. 한때 저는 놀라울 만큼의 여러 가지 임재와 역사들을 경험하였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버린 것만 같습니다. 한때 내가 기도하면 그분께서 반드시 들으신다는 확신이 가득하였지만, 지금은 그저 불안하기만 합니다. 나와 함께하기는 하시는지, 이것이 그저 불행이고 불운의 연속일 뿐 사실은 역사가 아니고 내 망상인 게 아닌지...... 내 눈에는 내가 끊임없이 의심스러워 보입니다. 지금의 내가 밟고 선 이 자리,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럴수록 단 하나를 명심해야 합니다 :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분께서 찾아오셨을 때에는, 하루아침에라도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한 법입니다. 따라서 내일이라도 그분의 때(카이로스)가 이르면, 하늘의 시간이 열리면, 모든 기도는 다 이루어질 것이고, 모든 역사들은 한순간에 즉시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나의 존재와 내 영혼의 상태와 내 삶의 외연이 얼마나 처참하고 어둡고 부정적이더라도 그것이 곧 믿음을 잃어버려야 할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상태를 보지만, "주는 영이시기에"(고후3:17),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영(Spirit)만을 봅니다. 영이란 무엇인가? 바로 의지(will)입니다. 내 마음이 어둡더라도, 그에 속지 않고 빛을 열망하는 것, 내 마음이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하더라도, 그 가운데에서 스스로 의식적으로 믿음과 순종을 선택하는 것. 내 마음이 교만하여 위선과 악으로 가득하더라도, 의식적으로 낮아짐과 시험을 치름과 십자가를 지는 것을 바라는 것. 의지란 "방향성"이거든요. 그분은 그 방향성만을 보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히11:1)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바라게 하시는 것, 죄 가운데에서 선과 선을 행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을 축복하는 것을 바라게 하시는 것, 이 '바람과 소망' 자체가 곧 우리에게 그분이 임재하고 계시다는 명확한 '보이지 않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상태는 상관없습니다. 영혼이 아무리 어둡든, 삶이 아무리 처참한 몰골이든, 상관없습니다. 내일 아침에라도 그분이 찾아오시거든 모든 것은 한순간에 빛으로 비추어 밝히어질 것이니까요. 상태에 속지 않고 의지적으로 믿음과 순종과 열망을 택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세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성전 삼으시고, 또한 우리의 영을 성전 안의 지성소로 삼으사,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창조주, 절대자의 빛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언제나 알려주시고", "그분의 권세와 영광이 언제나 내 두 손을 붙들고 계시고", "그분의 선하심과 기뻐하심과 온전하심만을 구하고 열망하게끔 이끄시고", "반드시 감당할 만큼의 시험만을 주시되, 필요할 때는 언제나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허락하시는"......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하나 같이 증언한 바에 따라, 그분은 그저 하늘에만 계시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두려운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되, 오직 내가 사랑하는 모습으로, 내가 기뻐하는 모습으로, 내가 감동하는 모습으로...... 마침내, "인격"으로, 내게 오실 것입니다. 가장 거룩하신 분께서 가장 친밀하신 모습으로 자기를 낮추사 우리에게 임재하실 것입니다. 세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우리와 함께하시는지, 를 보여줍니다.
첫번째 말씀과 연결된 오쇼젠 카드는 "물 8번 : 내맡김"입니다. 이것은 또한 순종의 중요한 혼(soul)적 실재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내맡기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능동태에서 수동태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내가 한다, 내가 해야만 한다"에서, "나보다 더 높이 계시는 분"의 의지를 더욱 신뢰하고, 그분께 능동적으로 나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능동태의 관점에서는, 이것을 <포기>라고 생각합니다. 원래는 내 손으로 해야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 이 내맡김, 곧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죄성과 맞서 싸우면서 영혼의 중력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는 신앙의 초기에는 이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포기는 순종의 본질이 아닙니다. 순종의 외적인 모양의 한 형태일 수는 있죠.
그렇다면 능동적 수동태의 관점에서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바로 "기쁨", 곧 바라고 원하고 소망하는 것, 이라고 합니다. 주를 만나지 못한 자는, 주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모릅니다.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사탄이 나타나서, "왼쪽에는 세속의 부와 명예와 권력이 있고, 오른쪽에는 주를 만나는 길이 있다. 단, 오른쪽을 선택하면 너는 앞으로 얻게 될 모든 것을 다 잃을 뿐더러,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다 잃게 될 것이다. 어찌하겠느냐?"하고 묻거든, 그는 주저없이, 혹은 잠시 망설일지라도 결국 왼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것을 단죄나 심판의 어조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주를 영접하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뵙지 못했고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알지 못하기에, 아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영혼의 참된 즐거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자연스럽게 "이미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즐거움"인 세속적인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운동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를 영접한 자, 성령을 체험한 자는 어떠할까요? 아주 사소하고 가난한 방식으로나마 주의 계심을 목격하고, 주의 임재와 역사를 받은 사람은, 주저없이, 혹은 잠시 고민하더라도(저는 의롭지 못함으로 고민이 길 것입니다, 저 스스로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또한 기뻐합니다), 반드시 오른쪽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주님, 제가 당신께로 가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겠습니다. 당신께로 가는 길에서, 내가 굶주리고 헐벗고 죽지 않도록 당신께서 나를 돌보실 것을 내가 진실로 믿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바로 이 순간의 영혼의 참된 즐거움과 기쁨이 얼마나 큰지, 경험하지 못한 자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우리를 비웃고 모욕하고 조롱하겠죠. 그러나 이미 "생명의 물의 맛을 본 자"는 다릅니다. 사람은 더 이익이 되고 더 즐거움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게 당연한 동물입니다. 영혼의 즐거움이 세속의 즐거움보다 압도적으로 크므로, 더 적은 즐거움을 버리고서 더 큰 즐거움을 선택함은 능히 가능하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사41:10)는 것은 곧 언제 어디서라도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는 의미이며, 이것이 곧 임재입니다. 그리고 이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념적으로만 믿는 것"은, 억지로 내 욕망을 포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시는 가능할지언정 내 능력으로는 죄를 이기지 못하기에 결국엔 종국에 하나님을 배신하고서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지시는 그분을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임재를 경험한 자는, 물론 세속의 즐거움이 잠시 떠오르기야 하겠지만, 곧 그보다 더 큰 즐거움,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기쁨, 죽음을 넘어서, 아니 시간의 끝을 넘어서까지 이어지게 될 참된 즐거움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들은 기꺼이 내려놓고 떠나보내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말씀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또한 나를 도우시니,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는 것이지요. 첫번째 말씀을 묵상할 때는 이와 같이 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분께서 나를 참으로 도우시고 의로우신 손으로 붙드시니, 나 역시도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고 떠나보내야지" 하는 진실한 마음을 품는 것이지요.
말씀을 읽고 진실한 마음을 내는 것, 이것이 묵상입니다. 단순하죠.
두번째 말씀은 더욱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속의 것은 겉(육신)으로는 풍요로운 듯하나 속(영혼)으로는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항상 그러합니다. 세속의 욕망은 능동태입니다. "내가 한다", "내가 소유한다", "내가 가진다", "내가 쟁취한다"...... 자아(ego)는 언제나 내면(영혼)의 것은 외면하고, 외부(육신, 세속)의 것은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깥의 것을 갈망하는가?
사실은, 자아의 깊은 곳에는 무의식적인 어두움, 곧 두려움, 공포, 불안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이 수치심과 억울함을 만들고, 이것이 죄의식과 열등감을 만들며, 이것이 다시 교만과 욕망을 만들며, 최종적으로는 욕망이 자기 아닌 바깥으로 끊임없이 투사되고(안에는 어두움밖에 없으니까요), 다시 투사된 바깥의 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합니다(자기 바깥의 우월한 것으로 자기 안의 열등한 것을 제거하려 드는 것).
이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증언하려고 하면 책이 여러 권 필요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일들을 많이 하기도 했구요. 그러나 이젠 이런 복잡한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이 세대", 즉 세속에 속해 있는 무리들과 세력들과 집단들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나 증오나 모욕이 아니라, 영적인 원리와 메커니즘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뜻, 나의 의지에 집착하면 할수록, 자기 안의 무의식적인 어두움은 돌고 돌아서 더욱 커지고, 더욱 커진 것이 더욱 공포와 욕망을 커지게 하며, 그렇게 커진 욕망이 더 큰 공포를 결과로 불러오고, 그것이 다시 무의식의 어두움으로 축적되는...... 참으로 절망적인 죄의 반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저는 윤회를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오늘 기뻐하지 못했는데, 내일 역사가 이루어지더라도 내가 기뻐할 것인가."
다만,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자아(ego)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의 나의 마음은 언제나 바깥의 것을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구조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를 재단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아, 내 마음이 또 다시 자기의 본성대로 움직이는구나.' 그렇게 이해하고 그 자체를 수용하되, 다만 "허락"해줘서는 안 됩니다. '그래,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다. 나는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을 의지적으로 따르겠다.'
여기까지는 쉽지요. 한마디로, 욕망 가운데에서도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세속의 것을 향한 욕망, 곧 나의 의지는 "겉으로 풍요하더라도 속으로 썩어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겉으로 잠시 가난하더라도 속으로 풍요하고 영생하는" 길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영원히" 가난하라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은 그저 엄격하시기만 한 분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슬퍼하고 아파할 때에는 언제나 하늘의 모든 일들을 다 제쳐 놓으시고 내게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지금, 이 날, 이 시간에, 내가 이러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그 은밀한 증거 중 하나이구요. 이 시험이 끝나는 날, 그분께서 뜻하신 바로 그 뜻이 이루어지는 그 때에, 그분의 뜻과 그분의 때가 이루어지는 그날에, 이 가난함은 반드시 끝이 납니다.
나의 하나님은 벌주시고 심판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를 살게 하시는 분, 나의 영혼을 영원히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 보시기에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는, 잠시 간에 우리에게 "덜 중요하고 나중 되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제거하고, 좌절시키게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도 돈이 없어서 자녀가 어릴 때 그 선물 하나를 사주지 못한 것이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는 법인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오죽하겠습니까. 자녀를 둔 부모 세대의 크리스천들은 제 말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가난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그분의 의롭고 선하신 뜻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앞의 어려움과 고난과 곤궁함" 속에서 속지 않고 말이지요.
이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알아내려고 하는 고집, 지적 교만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1GB짜리 USB 안에 1TB짜리의 데이터를 다운로드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테라 중의 1기가, 즉 일부만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게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하나님의 1기가짜리 데이터(뜻)는 우리 눈에는 매우 이상해 보일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본래 그러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 가운데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지를 명확히 알고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 "영혼이 기뻐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설명하기가 난감합니다. 나의 육신이 욕망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나의 영혼이 열망하고 기뻐하는 것은 나를 참되게 하고 살게 합니다. 이것은 소위 부르는 '양심'이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무언가 다른 것입니다. 예컨대, 어느 추운 겨울날에 그나마 따뜻한 자리를 찾아 할 일 없이 앉아 계시는 노인 분들을 마주할 적에, 내 안에서 "가서 그들에게 양식을 전하라"는 그분의 명확한 음성을 내가 듣는 바, "혹시 실례되는 거 아닐까?" 하는 망설임 끝에서도, "에이, 기왕에 후회할 거 차라리 순종하고 후회하자" 결심하여, 당장 다음 달을 보장할 수 없는 내 가난함 가운데에서도 끝내 따뜻한 음식을 사서 전해드리고는 나는 나의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내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뻐하는 것은 욕망입니다. 영혼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이 진실(Truth) 하나로 인해서 순수하게 기뻐합니다. 그러한 기쁨이 분명히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 감각"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담대히 "덜 중요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내려놓음, 내맡김, 비움, 떠나보냄, "물 8번 : 내맡김"의 내적 상태가 항상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약간의 슬픔의 결을 띱니다. 그러나 세속의 것과 달리, 내려놓고 순종하는데 대한 슬픔은 맑고, 투명하고, 아름답습니다. 결이 다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 슬픔으로 빛을 낼 때,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 슬픔이 익숙해질 때, 우리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 자체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영혼의 기쁨의 감각에 눈이 뜨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시험"에 대한 세번째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이 시험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특히 제게 무척이나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저 세속적인 불운이나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험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질은 결국 '나의 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표증은, "바람과 소망"으로 나타납니다. 그저 세속적 불행이었더라면 나는 서둘러 내 욕망을 채우고 내 불안을 해결해버리려는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 가운데에서는 매 순간의 시련과 고난에 아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그 가운데에서 신앙은 더욱 깊어지고, 날이 갈수록 영혼이 순수해지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영적 감각이 날로 예민해지고 날카롭게 제련됩니다.
즉, 하나님의 시험을 알 수 있는 표증은 : "육적으로는 낮아지되, 영혼은 더욱 순수하고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지난 수 년간, 저는 시험을 거쳐왔습니다. 이것이 시험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더욱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시험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외적인 것들은 "아주 일관되게" 일정한 시기마다 좌절되고, 무너지고, 낮아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내적인 것들은, 나의 영은 더욱 선명해졌고, 나의 영혼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고 순수하고 충만해져만 갔습니다.
"이 시험이 언젠가 반드시 끝날 것이다. 내가 너를 영원한 고통 속에 두지 않으리라." 저는 그분의 뜻을 믿습니다. 기사는 왕의 의지에 질문하지 않는 법입니다. 더욱이 그분의 뜻을 알 수 없는 필멸자인 우리들은 충성을 넘어선 열망으로 응답해야만 합니다. 어리석음 가운데에서 교만하고 욕망함은 죄가 되나, 어리석음 가운데에서 기뻐하고 열망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늘의 보화가 됩니다.
이 시험을 치르게 하시는 데는 명확한 의지가 있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같지 않으시기에, 이 시험이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떤 과정들을 치러내야 하는지를 모두 다 설계하고 계시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하늘에서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변화는 그저 표면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변화는 내 영혼을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기 위함이며, 이 변화는 나의 영을 완전하게 되살리시게 하시기 위함이며, 이 변화는 마침내 나의 죽음과 사망의 운명으로부터 완전히 나를 자유케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변화는 완전하고 영원할 것이며, 이 변화는 위대하고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토록 위대한 변화를 위한 시험, 곧 "영원한 생명을 위한 시험"을 치르는데, 이만하면 오히려 편안하지 않습니까. 그리 마음을 바꾸어 먹어 보십시오. 천국에 들기 위한 시험인데, 때마다 죽지 않도록 입을 옷과 먹을 양식과 거할 집을 챙겨주시고, 또한 때마다 보이지 않는 위로와 은혜와 축복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데, 외아들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길에 비하면 우리의 시험이 "5성급 호텔에서 숙식하면서" 치르는 시험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믿음을 잃지 않는 것", "때때로 시험 가운데에서도 기뻐하는 것", "가끔씩 고난 가운데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열망하는 것"(사실 이건 자주 되지는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밀어붙이지는 마세요), 그것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그분께서 전부 나의 영과 영혼을 작업하고 제련하고 손질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은 영원하지 않으며, 반드시 때가 되면 그분의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믿음은 제게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주님,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내가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내려놓는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나이다. 그리고 이 슬픔 가운데에서 오직 영원한 것만을 열망하는 마음으로, 당신께 순종하겠나이다."
믿는 자의 안에서, 지금도 그 변화는 현재 진행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