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암기 비급을 찾아서
공부가 괴로운 이유를 한 가지만 뽑으라면, 그건 아마 '암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중학교 때 배우는 주기율표 같은 것은 그 내용을 통째로 외울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종류의 암기는 서사가 없어서, 잘 외워지지도 않습니다.(산소가 주기율표 8번째 원소인 것에 과학적 이유는 있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단지 외워야 할 숫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암기법을 만듭니다. 주기율표의 경우에는, 원소들의 첫 글자를 따서 수헬리베붕탄질산~ 같은 식으로 외우기도 하고, 구구단처럼 암기할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암기법이란 것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비급과도 같아 보입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구구단 노래나 주기율표 초성 암기법 따위를 교과서에서 배운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정보는 부모님, 학교나 학원 선생님, 친구들에게 들음으로써 얻어집니다. 개중에는 아주 환상적인 암기법도 있고(한 글자씩 따서 실존하는 단어가 된다던지), 반면에 아주 조악한 암기법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한 번 만들어볼까' 같은 생각도 하지만, 보통 손수 만든 것이 방금 들었던 암기법보다 더 별로라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흘러 제가 스승이 되니 제가 모은 암기법을 제자에게 전수해 주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달의 공전에 따른 모양 변화를 가르쳤는데, 이 단원에서는 달의 모양을 보고 그것이 초승인지, 상현인지, 하현인지 구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반달 모양일 때, 어느 쪽이 밝은지에 따라 상현과 하현이 갈립니다. 여러분은 달의 왼쪽 절반이 보일 때가 상현인지, 오른쪽 절반이 보일 때가 상현인지 아시나요?
정답은 오른쪽입니다. 제가 중학생 때 이 내용을 처음 배울 때는 외우는 법을 따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오른쪽이 상현이다"라고 반복해서 되뇌는 식으로 암기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참 별로인 것이, 며칠 후에 떠올리려 하면 "'왼쪽이 상현이다'였나? '오른쪽이 상현이다'였나?" 하고 헷갈리게 됩니다.
그러다,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다시 이 내용을 배울 때 과학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암기법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수학에서 미지수 x를 쓸 때, 우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를 먼저 그리고 그다음 ‘(’을 그립니다. 마치 ‘)(’처럼 말이죠. ‘상(上)’이 ‘하(下)’보다 먼저이니, 먼저 그려지는 오른쪽이 상현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이후에도 헷갈릴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과외생에게 고등학교 선생님이 알려주신 암기법을 전수했답니다. 그걸 알려준 이후로는 한 번도 헷갈려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당연히 다른 강사/교사 분들도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의 암기법을 학생에게 전수하시겠죠? 이렇게 몇 세대를 거치다 보면, 언젠가는 교육과정 전체를 정복하는 더 이상 손댈 곳 없는 ‘궁극의 암기 비급’이 탄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걸 볼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