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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지 Jun 12. 2023

이해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공감능력이 호구버튼라는 세상이 싫어서

나 스스로는 결단력있고 맺고 끊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도어 슬램(Door Slam)'을 하는 둠스데이에나 가능한 일이고 평소에는 모든 가능성에 기회를 주는 편이다.


악인에게도 사연이 있을 것이라 '이해'를 심어주는 행동에 내 주변의 ST들은 이미 답답해 죽고,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앓느니 죽지하는 심정으로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내 소견으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맹점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섣불리 남을 평가하는 일도, 함부로 사건의 결론을 추리하는 일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상상력은 이미 거기까지 달려갔다 왔지만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허탕의 시간들이 내 과오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INFJ는 내가 잘못한 게 없는 일에도

일단 내 잘못부터 찾는다.



손뼉도 맞붙어야 소리가 난다는데, 아무리 저 치의 잘못인들 나는 무결한 사람일까? 이 사건에서 내가 무결하다해도 내 운명까지도 무결할까?


(종교는 믿지 않지만 운명이나 인연 따위의 거대한 힘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망상까지 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참고 또 참는 사람이 되었다. 속으로는 쌍욕과 울분을 삼키면서 나만의 논리로 이 부조리를 설명하려고 애쓴다.





결혼을 앞두고 예비 시어머님께서

우리 집에서 잠시 머무르시게 되었다. 



자기 공간을 침범받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대단한 도전이었고, 한편으로는 'K-장녀'로서 당연한 미션이기도 했다.


나는 종갓집도 아니면서 남녀차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듯한 친가를 뒀다. 제삿날에는 남녀 상을 따로 썼고, 여자는 제삿상에 절도 못하게 했다. 나는 그냥 독고다이로 가서 내 소원을 빌었고, 우리 아빠는 꼬치떨어진다는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엄마 대신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우리 가족 나름의 발버둥은 있었으나 보고 자란 것이 그런 것이라 웃어른 말씀은 무조건 수용해야하고 남녀는 이렇게 유별하다는 생각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예비 시어머님은 나와 성격이 참 닮았다. 나는 첫 눈에 그걸 알아봤고, 그 분의 인생과 고독과 빛나는 예술욕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친정엄마에게서 찾지 못한 영혼의 한 조각을 이 분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함께 산 며칠 동안에 시어머님은 같은 이야기를 서너 번을 반복해서 하셨고 결국 남친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요는 이렇다. 어머님의 인생에서 항상 어머님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은 모두 '신씨'였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 뿐인 아들에게 절대 신씨 며느리는 데리고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이 말 조차 신신이네.)


그걸 알고 있었던 아들은 최종의 최종 순간까지 여자친구의 성씨를 말하지 않았고, 식 날짜를 다 잡았다고 말할 즈음에야 '사실 여자 친구 성씨가 신씨야.'라고 털어놓았던 것이다. 아들은 '근데 엄마가 싫어하는 평산 신씨가 아니라 고령 신씨라고 좀 작은 신가야.' 덧붙이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게 그거일 뿐이었다.


어머님의 이 레파토리의 의도는 이렇다. 본인이 그렇게 싫어하는 신씨 집안 며느리를 두게 되었지만 이것 또한 인연이지 않겠냐는 것이다. 인연이 그렇게 흐르면 사람이 어떻게 한다고 해도 피할 수가 없는 노릇이고 이건 우리의 필연이라고.


나는 그 의견에 십분 동감하는 입장이라서 어머님의 말씀이 서너 번이나 반복했다는 것을 제외하고 나면 그닥 마음 상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 남자친구의 입장에서는 꽤나 충격이었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어디서 말로만 듣던 '아들엄마' 행세를 하고 있다니! 그리고 내 친구들은 '제발 남을 이해하는 것 좀 그만해! 너 지금 모욕적인 말을 들은거야.'라고 했다.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또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잖아. 공감이 가버리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싶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무결하다고 할 수 있는가? 나에게도 편견이 있다. 인천 사람들은 계산적이라는 편견. 모든 인천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 경험의 안에서는 수십이 그랬었고 나는 그게 나름대로는 괜찮은 모수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라면 당사자의 면전에서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긴하다. 하지만 어머님의 인생에서도 그런 편견 하나쯤 있고 나와 편해졌고 술도 들어간 상황에서, 이정도는 말씀하셔도 된다고 실수하신게 아닐까 생각했다.사람의 실수에 대해서 또 그렇게 인색할 필요가 있는가 싶어 나는 덮어두고 넘어가려고 한 것이다.


이걸 이렇게 글로 풀어낸 시점에서 나도 완전히 덮지는 못했던 것 같긴 하다. 서운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조금 모욕적이기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공감과 상상력이 호구라고 말하는 세상이 싫어서 나는 조금이라도 바보 같더라도 내 소신대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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