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들이 나보다 더 잘 나갈 때
질투쟁이가 질투를 멈춘 순간
고등학교 때는 모두 똑같은 교복을 입는다. 왜 학생은 교복을 입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그 의문은 30살이 돼서야 풀렸다. 교복은 학생 때만이라도 보이지 않는 신분 격차를 숨겨주려는 사회의 배려다.
나이를 먹을수록 옷에 달린 브랜드를 알아보게 되고, 원단의 질감을 보고 품질을 따질 수 있게 된다. 옷은 생각보다 그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몰랐다. 같은 교실에 있던 친구와 내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줄은, 그리고 그 격차가 점점 벌어질 수도 있음을.
처음 격차가 벌어지는 건 ‘대학교’ 일 것이다. 그 이후는 ‘취업’이다. 또 취업 다음부턴 훨씬 더 강력하고 현실적인 격차가 시작될 것이다. 누구는 부자가 되고, 누구는 명예와 인기를 얻고, 누구는 부모의 힘으로 처음부터 사장이 된다. 또 누군가는 모든 것에서 낙오되기도 한다.
나는 절친들 사이에서 가장 인지도가 있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장 늦게 취업을 한 케이스다. 절친들은 자기들끼리 약속이라도 한 듯 졸업 직후 하나같이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장에 긴 취업준비기간 없이 턱턱 들어갔다.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앞서갈 때 느끼는 자괴감과 초라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나는 취업준비기간 동안 친구를 만나며 다음과 같은 일을 겪었다.
나에게 취업과 관련해 충고를 하는 친구,
돈을 아끼는 내 모습을 보고 비웃는 친구,
용기를 준다며 취업사실을 알리며 기뻐하는 친구 등이 있었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쁜 사람은 아님에도 뒤처진 친구를 대하는 데는 좀 어설펐던 것 같다. 또 아무리 친구라도 자기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이 들면 순간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격차는 앞으로 벌어질 격차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직감했다.
나는 뒤처졌다는 사실에 많이 괴로워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앞서가는 친구들 덕분에 나 역시 평균보다 더 빨리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친구들의 존재는 스트레스이면서 내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질투와 자괴감을 충분히 느끼는 시간이 지나 그들의 성공을 축하해주고 동시에 나의 초라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역시 원하던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생에 완전히 백기를 들고 자세를 낮출 때, 아이러니하게 인생이 술술 풀리는 경험을 하곤한다.
질투쟁이였던 나는 이후로 질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잘 나가는 친구를 보며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초라함을 느끼던 나는 이제 진심으로 그들을 축하한다.
혹시 내가 벤치마킹할 그/그녀의 성공 포인트가 없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다시는 친구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살았다.
그렇게 아등바등 치열하게 사는 나를 보며 아빠는 말했다.
“먼저 앞서가서 뭐하려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어차피 50대 되면 다 비슷한 지점에서 만날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질투에 이어 조바심도 멈췄다.
그래. 이렇게 인생이 나를 단련시키는구나, 나를 익어하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