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견뎌낸다는 것
재판받는 사람은 겸손해진다.
평소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던 이라도,
법정에서 서면 양손을 모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야 덜 아픈 판결을 받는다는 것을.
관건은 착하게 보이는 것이다.
법관은 자신 앞에 선 이가 착한 이인지 나쁜 이인지 알 수 없다.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착하게 보이는 이는 덜 세게 때리고,
나쁘게 보이는 이는 더 세게 때린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판사도 안다.
그래야 판결에 이유가 생긴다는 것을.
그런데 이대로면 '생긴 게 범죄자'인 이는,
'그래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눈깔 착하게 뜨고 다니'려고 해도 안 된다.
다행히 판사는 안다.
관상으로 유무죄를 따지면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얼굴이 아니라 차림새를 본다.
착해 보이는 차림새에 정답은 없지만,
법정에서 착해 보이는 차림새에는 해답이 있다.
판사와 비슷하게 입으면 된다.
되도록 위아래가 한 벌인 정장을 입고,
안에는 흰색 셔츠를 받쳐 입으면 된다.
남자는 꼭 넥타이를 맨다.
여자는 대부분 장신구를 안 한다.
도박을 한 운동선수나,
마약을 한 방송인이나,
음주운전을 한 연예인도 법정에 서면 이렇게 입고 나타난다.
이들의 낯선 옷차림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법정패션과 양형의 관계가 무어 대단한 양 호들갑인가 싶다.
그러나 핵심은 복장이 던지는 메시지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옷차림으로 휴전 협상을 이끌어 냈다.
앞서 미국 대통령과 첫 협상에 실패하고서,
다시 백악관을 찾아가 얻어낸 성과였다.
언론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군복을 벗고 정장을 입은 것이 주효했다고 평가했다.
군복은 '싸우겠다'는 메시지이고,
정장은 '존중한다'는 의미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외교 무대도 이럴진대,
비좁은 법정에서 법대(法臺)에 존중을 표하지 않으면,
당사자는 원하는 걸 얻기 어렵다.
검사와 변호사가 판사와 같은 복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법정의 다른 당사자인 이들은 더 센 판결(검사)과 덜 센 판결(변호사)을 바란다.
하물며 직접 당사자인 피고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날 법정에서 본 이는 위에 장황하게 적은 '차림새 이론'이 무색한 모습이었다.
기하학무늬의 밝은 색 계통 셔츠와 몸배 비슷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전형적인 '시장통 아줌마'(비하 의미는 없음)였다.
혐의는 위증.
공소사실 구절구절마다 사연이 가득했다.
동대문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그녀는,
하루는 가게에서 취객끼리 시비가 붙었고,
쌍방 폭행 사건의 목격자로서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는데,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었기에 소극적인 증언을 했고,
이 과정에서 일말의 거짓이 섞이게 되어 재판이 꼬이자,
수사기관에서 이를 문제 삼아 그녀를 재판에 넘긴 것이었다.
공소사실을 확인한 판사는 유무죄를 다음 재판에서 가리기로 했다.
그러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오늘 유죄 선고하시고 재판 끝내주세요"
판사는 적이 당황한 눈치였다.
착하게 보이려고 애쓰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는 숱하게 봤다.
그런데 그녀는 법대에 대한 존중도 없이 유죄를 인정했다.
판사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음 재판 날을 공지하고서 퇴장하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재판을 나오려면 장사를 쉬어야 해서 그래요. 그냥 유죄 선고하고 재판 끝내주세요."
법정 경위는 그녀를 제지했다.
유무죄와 법정 소란보다 중요한 것은,
하루를 먹고사는 일이었다.
그녀가 다음 재판에 출석했는지,
출석했다면 유무죄 판결이 어땠는지,
그녀 말마따나 유죄였다면 형량이 얼마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그날은 우연히 얘기되는 사건이 없었고,
어딘가에 홀린 듯이 법정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만난 것뿐이다.
이후로 나는 다시 이른바 '얘기되는 사건'을 좇았다.
반성할 기미 없이 '착하게 보이려'는 이들에게 함몰되어 기사를 썼다.
문뜩 그녀가 다시 생각나고서,
나는 이제껏 그리고 기껏 무슨 기사를 쓴 것인가 싶었다.
마치 법정 패션이 대수인 것처럼 위에다 적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