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는 것

누구나 아는 사실은, 누구는 모르는 사실이다.

오픈북은 어렵다.

책을 펴고 시험 보라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책에서 힌트를 찾을라치면,

문제에 개념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뭣도 모르는 이는 마주친 힌트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더욱이 내가 아는 걸 너도 알 수 있다.

나만 돋보이기 어렵다.


법원을 취재하면서 늘 오픈북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재판은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다.

취재 기자 모두가 오픈북을 가지는 것이다.

법정에서 만난 방청객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회사로 찾아갔는데 만나주질 않아서 여기 온 거예요.”


회사를 말아먹은 재벌한테 따지러 온 주주였다.

재벌은 주주에게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공개 법정에서 둘은 간격을 좁혔다.

주주여서 법정 출입이 허락된 게 아니다.

회사와 이해가 얽히지 않은 나도 그 법정에 있었으니까.

독자도 그 법정에 있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재판을 공개하라는 건 최고 법률인 헌법에 나온다.

과거 덮어놓고 재판을 하던 시절**,

어떤 사달이 나는지 우리는 안다.

여기서 얻은 값비싼 교훈 덕에 재판은 일반에 공개된다.

여기서 나만 돋보이는 기사를 쓰기란,

여간내기가 아니고서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능한 취재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법원 기사를 잘 쓰는 기자가 내공 있는 기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실은 다르다.

회사(언론사)는 생각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우선 소속 기자들 모두 내공이 충만한 건 아니다.

이들이 내공을 기르려면 비용이 발생한다.

비용을 감당한다고 해서 이들이 내공을 쌓는다는 보장은 없다.

비용을 감당할 만큼 언론계 사정은 넉넉하지 않다.

그러니 누구나 아는 내용보다,

나만 아는 내용을 찾는 게 쉬운 길이다.

상당수 언론은 열려 있는 법원 취재에 힘을 뺀다.

그리고 폐쇄적인 검찰에 집중한다.

누구나 가능한 취재는 어려운 법이지만,

누구나 불가능한 취재는 쉬운 법이라니,

애당초 취재는 그 자체로 어려운 것인 모양이다.

(검찰 취재 얘기는 따로 자세히 쓸 예정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법원을 못,

아니 안 버린다.

독자가 궁금해하는 이름 난 이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줄을 서서.

퇴직한 대통령은 약속이라도 한 양 재판을 받으러 온다.

대통령은 전직이라도 대한민국 최고 취재원이다.

아까처럼 회사를 말아먹은 재벌,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

약에 손을 댄 방송인,

뒷돈을 받은 관료,

도박에 빠진 체육인.

독자의 이목을 끄는 이들이 끝없이 법원으로 온다.

돋보이기는 어렵지만,

그저 반드시 소화해야 하는 기사들이 차고 넘친다.

이런 기사를 소화하면서 깨쳤다.


'남들처럼 하면 오픈북 시험에서 중간은 간다.'


다른 기자들 생각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어느 언론이든 법원 기사는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많)다.

대체로 한결같은 언론사 기사를 보면,

언론 생태계가 과연 건강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런데,

그날은 거기서 거기인 기삿거리가 없었다.

그저 그런 기삿거리도 없었다.

여기서 저기인 기삿거리도 없었다.

보고 또 본 듯한 기삿거리도 없었다.

그저 기사가 없었다.

이 기자와 저 기자에게 물었는데,

같은 대답을 했다.


'오늘 뭐 써야 하죠?'


우리는 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고 있었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

개념이 부족한 채로 시험을 치르는 이들에게,

오픈북은 어렵다.

(또 이어서)


*헌법 109조, 형사소송법 276조에 그러라고 나와 있다. 다만 국가안보 위협, 피해자 신분 노출 등 예외 사유가 있으면 비공개로 전환한다. 참고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은 재판이 아니라 절차에 해당해서 공개재판 원칙을 비껴간다(고 한다).

**사실 그 시절에도 헌법에 공개 재판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법은 존재보다 존중이 중요한 것 같다.

***법원, 검찰 등 법률 시장 통칭. 통상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법조타운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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