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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한 하루 Mar 17. 2021

두 돌 된 손자를 맞이하는 자세


친정에 도착해서 서재에 짐을 풀었다. 서재의 주인 동생은 벽지에 예민했다. 본인이 선택한 푸르스름한 파스텔톤 벽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때가 타지 않게 각고의 노력을 가했다. 기대는 것은 금물, 잘 때도 베개로 벽을 보호했다. 하지만 내가 결혼하자 동생은 변심했다. 흙침대가 놓인 내 방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주인이 없는 이 방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젠 나도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를 외친 아빠가 새 주인이 되다.


버려진 책상 하나를 깨끗이 닦아 놓으니 아빠 책상이 되었다. 집 안 곳곳에 흩어져있는 책장 세 개를 모았더니 그럴듯한 서재가 되었다. 인테리어가 필요하다고 느낀 아빠는 소품 몇 개를 사서 올려두셨고, 추운 겨울을 대비해 선풍기형 히터까지 들이며 그 방을 오롯이 당신의 공간으로 만드셨다. 그래서인지 친정에 갈 때마다 아빠 서재에 추가된 물건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장을 보니 문학과 신앙 도서가 늘어있다. 이번엔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영어 공부를 하셨는지 책 한 권과 이면지가 놓여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책상 서랍이 보이질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간신히 찾은 곳은 책장 위!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서랍 두 짝이 보였다. 아이가 어지럽힐까 봐 미리 선수를 치신듯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밖으로 나왔다.



집 나간 서랍 두 짝을 찾습니다.




아뿔싸! 거실은 더 가관이다. 기품 있는 장식장들이 빡빡 깎은 뒤통수를 드러낸 채 나를 맞았다. 부엌에서 나오신 엄마가 '우리 딸 고생 많았지'하며 꼭 안아주셨다. 6개월 만에 본 엄마는 더 늙어 있었다.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장식장이 이게 뭐야?'하고 말을 돌렸다. 사실 알고 있었다. 장식장이 등을 돌린 이유를.


작년 여름, 우리 아이는 이 장식장을 얼마나 열고 닫았던가! 거기서 그치면 다행이지만 물건을 꺼냈다가 던졌다가 섞었다가. 뒷정리로 정신없던 나를 보며 엄마가 떠올린 묘책이었다. 덕분에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먹고 한 숨 돌리려는데, 적응이 끝난 아이가 방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아빠 서재와 삼촌 방에서 얻을 것이 없자 큰 방에 들어갔다.


큰 방은 아이의 이력이 화려한 곳이다. 엄마가 아끼고 아끼던 크림을 얼굴에 잔뜩 바르고 나온 기억이 등줄기를 스쳤다. 그 통을 어떻게 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엄마 돋보기안경을 보기 좋게 두 동강 냈다. 새 안경을 맞출 때 우리 살림을 걱정하시며 셀프로 결제하던 엄마 모습도 떠올랐다.


허겁지겁 큰 방에 들어는데 따라오시던 아빠가 말씀하셨다. "이렇게라도 하면 모를까 싶어서 너희 엄마가 가려놨다." 보자기로 화장품을 가린 엄마를 생각하니 우습기도, 애처롭기도 했다. 동생은 그렇게 막아봤자 다 안다며 괜한 수고라 했다. 효과는 제법 길었다. 이틀. 단 이틀 만에 작은 손을 무기로 화장품을 꺼내 오는 아이를 보며 모두 웃음이 터졌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한복을 꺼내오셨다. "돌에도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못 찍었는데, 이번에는 찍어야지." 내가 준비하지 못한 아이 한복을 엄마가 마련해놓으셨다. 아빠와 엄마가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며 아이의 관심을 돌릴 동안, 동생이 사진을 찍었다. 남편과 둘이서는 어림도 없을 일이 가능해지고 있었다.


세 명이 육아를 도와주니 아이는 시간을 보낼 사람이 많아 기뻤고, 나는 쉴 수 있어 행복했다. 엄마가 일을 나가신 오전에는 아빠, 오후 1시부터는 엄마, 저녁 7시 이후는 동생이 함께했다. 잠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을 차례대로 집합시키는 아이 덕에 오랜만에 함께 누워 이야기도 했고,  아이가 잠들를 기다렸다가 한 명씩 육퇴 하는 작전을 세워 성공다.


내가 빠진 가족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두 돌 된 손자를 맞이했다. 조용히 책을 읽던 아빠는 서재를 아이 놀이터로 내어주셨고, 아침이면 아이와 산책을 나가셨다. 허리가 아픈 동생은 흙침대에 누우려 할 때마다 찾아오는 작은 손님을 웃으며 반겼다. 결혼한 딸과 손자 밥을 해 먹이느라 바쁜 엄마는 화장품 바를 시간조차 반납하셨다.


그렇게 내가 빠진 가족은 첫 돌에 이어 두 돌에도 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채, 여러 날을 애쓰고 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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