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은 삼겹살이었다. 기름기가 가득한 접시를 30분째 닦다 보면 서울집에 두고 온 식기세척기 생각이 절로 난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나의 노동력 없이도 딩딩 디리리 경쾌한 소리로 뽀독한 접시가 완성되었음을 알려주던 그 기계.
다행히 제주집에도 나의 설거지를 도와주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청보리다. 제주에 있는 우리 집은 한적한 시골동네라 주위가 온통 밭이다. 사계절동안 알뜰하게 사용되는 밭에 청보리도 한 계절을 담당한다. 4월이면 싱크대 너머 부엌 창으로 청보리가 넘실댄다. 파도를 타고 서핑하는 서퍼처럼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휘어지는 청보리 무리는 볼수록 장관이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오기도 하는데, 나는 설거지를 하며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다니. 나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보통의 풍경이 새삼 감사해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세제와 베이킹소다를 섞어가며 뜨거운 물로 접시의 기름기를 손수 닦아낸다. '식기세척기대신 청보리를 택한 내 삶에 브라보!'를 외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