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함부로 침략하는 지금 현실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은 안으로 급속히 민주주의 체제를 파괴 중이며 밖으로는 베네수엘라 침공에 이어 이란과 전쟁 중이다. 국제법을 가볍게 무시하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국제질서는 무너지고, 우리는 강대국의 행태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계속 약육강식 논리가 먹힌다면, 중국의 대만 병합은 시간문제 같아 보인다.
트럼프 정권 실세, JD 밴스 부통령 배후엔 실리콘밸리 IT 억만장자 페터 틸(Peter Thiel)이 정신적 지주라는 소문이 있다. 독일인 IT 억만장자 페터 틸이 칼 슈미트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나치 철학자 칼 슈미트(1888-1985)의 정치 철학은 현 세계정세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요즘 독일 신문 문화면에 칼 슈미트 언급과 소개가 꽤 보인다.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을 명료하게 구분한다. 즉, 어떤 상황이 친구와 적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면 정치적인 것이다. 여기엔 선과 악과 같은 가치 판단은 빠진다. 그저 적과 친구를 나눠서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는 정치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또한 ‘대공간의 질서’라는 개념을 통해 강대국이 약소국을 병합하는 것을 자연 법칙과 같은 수순으로 보았다. 감정과 도덕을 빼고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 정치 법칙을 서술한다. 약소국을 침략해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준다.
주목할 만 한 점은 칼 슈미트가 최초의 법이 윤리적 원칙이나 토론을 거친 의사결정이 아니라 질서 유지를 위한 폭력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법의 근간을 찾았다. 공동체 내에 통용되는 관습적인 법 노모스(Nomos)는 규범보다는 강요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노모스는 강자의 임의적인 법이다. 즉 왕, 지배자, 폭군을 법으로 체화한 것이다. 그의 저작 <정치 신학>에선 신과 같은 권력을 가진 지배자를 옹호하고 있다.
법학자 칼 슈미트에겐 강력한 권력, 법과 헤게모니, 적과 동지 개념만 있다. 도덕과 윤리는 끼어 들 틈이 없다. 칼 슈미트는 행간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세상은 비정하다. 법의 역사가 강자의 역사인 걸...’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독재로 귀결된다. 현재 세계에 펼쳐지는 형국이 그의 이론을 증명하는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진다. 칼 슈미트에 따르면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선으로 보이는 정치 행위조차 권력 투쟁의 한 모습일 뿐이다.
1985년 96세로 생을 마감했던 그의 철학이 되돌아와 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파고들고 있다. 칼 슈미트의 이론은 일리가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해 보인다. 자크 데리다도 윤리적으로 바람직하더라도, 모든 법 제정에는 폭력의 순간이 깃들어 있다는 칼 슈미트의 주장에 동의했고 조르조 아감벤도 칼 슈미트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철학을 발전 시켰다. 이 두 철학자가 칼 슈미트를 언급하고 영향을 받은 것을 보면, 칼 슈미트 사상의 근간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라는 걸 방증한다.
칼 슈미트의 사상이 현재 세계정세를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니, 과연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이론일까? 법과 정치 영역에서 인간을 빼 놓고 이야기하니 냉철한 권력 투쟁만 남는다. 내 생각이지만 칼 슈미트도 니체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칼 슈미트의 사상을 접하다 보니 번뜩 떠오르는 건 니체의 ‘힘으로의 의지(Wille zur Macht)’이니 말이다. 나는 평범한 시민이지만 이 사회의 주인으로 살고 싶다. 그런 시대가 막을 내린다면, 생각만 해도 어이없다. 천부인권사상을 바탕으로 세상이 합리적으로 굴러가길, 우리의 상식이 계속 상식으로 남기를.
얼마 전 하버마스 옹이 96세로 작고하셨다.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민주사회의 이론을 내놓았던 그가 죽었다는 게 상징처럼 다가와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하버마스는 가고 죽은 칼 슈미트가 부활하는가. 이런 흐름을 막고 대처하려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부터 해야 할까. 나를 잘 돌아보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나는 모순된 존재다. 하지만 비정한 칼 슈미트 세계에 수동적 타자로 살긴 싫다. 우리 모두 다 같이 평화롭게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