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한살, 러닝을 시작하다.

by 제이식

그날은 그리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연말연시의 이벤트들도 모두 지난 뒤라 별 다른 약속도 없었고,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가 한창인 그냥 그런 겨울밤이었다. 퇴근 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포만감으로 가득한 배를 끌어안고 소파 위에 누웠다. 팔과 다리는 문어발처럼 소파 위에 제멋대로 늘어트린 채, TV 채널만 빙빙 돌리고 있었다. 딱히 흥미가 가는 방송을 찾기가 어려웠다. 따분함이 느껴지려는 찰나, 한 곳에 시선이 꽂힌다. 거실 한쪽 구석. 거기에는 체중계가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바지를 입을 때마다 조금 힘겨움을 느끼고 있던 터라, 한번 몸무게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체중계 앞에 섰다. 그리곤 한 발씩 그 위에 무심히 올라섰다.


83kg


'고장인가?'

내가 아니라 기계를 먼저 의심했. 하지만 다시 올라가도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언제였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79kg이었는데... 커다란 거실 창문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내 모습의 반영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고 그 희미한 실루엣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배가 예전보다 조금 더 볼록해진 듯했지만, 마흔한 살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있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체중이 늘어도 괜찮은 걸까? 마흔 살이 넘으면 신진대사량이 줄어든다고들 하던데...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때,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운동을 해볼까?'


"운동". 지난 10여 년간 내가 이 단어를 몇 번이나 생각했을까?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춘기 소년처럼 내 몸의 변곡점을 직감한 순간, 그 단어로 내 머릿속은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그래, 운동을 시작하자! 그런데 뭘 해야 되지? 밖에 나가기에는 너무 어둡고 추운데..'


그때 지나다니며 봤던 아파트 헬스장이 떠올랐다. 그곳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다. 내 안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운동'이라는 불씨가 사그라들기 전에 빨리 무엇이라도 시작하고 싶었다.


아파트 헬스장은 집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다. 공동현관을 나서서 대략 50보 정도만 걸어간 뒤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헬스장이다. 하지만, 이사 온 지 4년이 다 되도록 한 번도 여기에 가지 않았다. 사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헬스장이란 곳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니깐 이곳은 나에게 미지의 영역이란 말이다.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그런 곳. 이런 위험한 곳을 혼자 가기에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우리 헬스장 한번 가볼까?"

그래도 아내와 함께라면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리고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여준 아내 덕분에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운동복 위에 두터운 패딩을 걸쳤지만 매서운 한파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이르자 헬스장에서 새어 나오는 빠른 비트의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음악소리는 나를 살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낯선 곳을 향할 때 항상 느껴지는 감정이다. 한 계단 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음악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에 호기롭던 마음은 혼비백산 사라지고 잔뜩 주눅 든 마음만 남은 채 헬스장에 들어섰다. 낯선 곳이다. 침침한 조명 아래 한쪽 벽에는 러닝머신이 늘어서 있었고, 반대편 벽은 전면이 거울이었는데, 이 벽과 중앙에는 운동하는 기구들이 줄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가장 안쪽 구석은 푹신해 보이는 매트가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역기와 아령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대략 나이는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근데 막상 왔지만 뭘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막막하다. 일단 몸을 푸는 척하면서 슬금슬금 곁눈질로 남들이 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다들 이곳이 익숙한지 운동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스트레칭이 끝나자 아내는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 러닝머신 위로 올라섰고, 난 슬며시 헬스장을 한 바퀴 돌며 할만한 운동을 찾아보았다. 운동기구들은 처음 보는 것들 아니면 본 적은 있지만 직접 해본 적은 없는 것들이다. 모든 것들이 낯선 것들 뿐이다.


'이거 한번 해볼까? 그런데 여기 어떻게 앉는 거지? 마주 보고 앉아야 되나? 등을 지고 앉아야 되는 건가?'


일단 앉는 방향부터가 고민이다. 내가 만약 반대로 앉기라도 한다면 이 작은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만으로도 그건 너무 아찔하다. 당장 온몸의 지방들을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슬슬 눈치만 보는 신세이다. 소득 없이 헬스장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왔을 때, 아내는 옆에서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러닝머신 위를 걷고 있었다.


'그래, 운동기구는 사람들이 하는 것 좀 눈 여겨본 다음에 하고, 오늘은 이거나 해야겠다.'


만만해 보이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섰다. 'start'버튼을 누르자 천천히 러닝머신이 움직이고, 나도 어쩔 수 없이 다리를 움직이게 된다. 속도를 조금씩 올려본다. 처음에는 걷다가 조금 빠른 걸음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조금씩 숨이 차 올랐다. 그래도 오래 달리기는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저 과거의 기억일 뿐, 현실은 아니었다. 속도를 내리자 조금 살 것 같다. 그러는 사이 몸에서 열이 오르고, 등 뒤로 한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심장을 달래기 위해 호흡 스킬을 써 본다.


씁~ 씁~ 후~ 후~


두 번을 빠르게 마시고, 두 번을 빠르게 내뱉는다. 뛰는 리듬에 맞추어서 들이마시고 내뱉으면 된다. '범죄의 재구성'이란 영화에서 박신양이 알려준 호흡 방법인데, 이제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히 기억난다. 덕분에 심장은 조금씩 안정되어 갔지만, 등을 타고 흐르는 땀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어느새 등은 땀으로 흥건해졌고, 몸은 완전히 달아오른 상태가 되었다. 이 상태가 되면 뛰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다. 내 호흡을 느끼며 계속 달린다. 처음으로 러닝머신 위를 뛰어보았지만, 금세 적응되었다. 앞에 조그마한 TV 외에는 시선을 둘 곳이 없으니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운동이란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종아리의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아마 근육이 피로해졌다는 신호일 것이다.


‘그래, 이만하면 됐어!’


너무 많이 뛰다 내일 절름발이 신세가 될까 두려워 ‘stop’ 버튼을 눌렀다. 기록은 2.5km였다. 러닝머신을 내려와 지루한 표정으로 러닝머신 위를 걷고 있는 아내에게 "이제 충분해."라고 말하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러닝머신을 멈추고 같이 헬스장을 나섰다.


밖에 다시 나왔을 때는 이곳을 올 때처럼 옹골진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여름날 산바람처럼 시원했다. 그 바람 따라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열기도, 지금까지 방치한 내 몸에 대한 죄책감도 모두 날아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