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과 음식(3) : 설탕, 사과, 술
"그때 알렉산드로스는 친구들에게 "이런 쓸데없는 식사에 대해 배워봤자 왕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방탕과 사치에는 반드시 비겁함이 따른다. 많은 음식에 탐닉하는 자들이 막상 전쟁이 터지면 참을성이 없어서 패배한 사실은 제군들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터다"라고 말했다."(폴리아에누스, <전쟁술> 중에서)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후세에 대왕으로 불리울 인물이
태어났다. 바로 알렉산드로스 3세다.
20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며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동방원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마케도니아-그리스 연합군 5만명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복에 나섰다.
누가봐도 이 전쟁은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가난에 찌든 작고 보잘것 없는 나라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를 무너뜨렸다.
10만이라는 대병력을 두 번이나 소집할 정도로 인력이 풍부했던 대제국 페르시아가 어떻게 소수의 침략군이 마케도니아에게 멸망당했을까? 우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린 마케도니아 군대는 소수였으나 지중해 일대에서 최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페체타이로이라는 보병 부대가 핵심이었다. 이들은 작은 방패와 5미터가 넘는 창을 쥐고 밀집 대형을 이루어 신속하게 이동하고 전진하는 것이 특징이다. 팔랑크스로 불린 전투 대형은 등껍질이 단단한 거북이가 긴 창을 꽂고 전진하는 모양새 같다고 한다. 이 대형은 전진속도가 느렸지만 앞에 있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지나갔다.
주제에서 약간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음식의 경제사>에서는
이 전술이 귀족이 주도하고
평민은 시종으로 따라나서던
전쟁을 평민 주도의 전쟁으로 바꾼
분수령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와 같이 소농을 포함한
시민들의 목숨을 건 참전이
그리스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폴리스를 위해 목숨을 건 대가로
정치 참여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는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와는 달리 넓은 목초지와 평원을 끼고 있어 우수한 군용 말을 대량으로 사육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로 원정을 가기 직전 마케도니아 왕실은 군마 약 3만 필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마케도니아의 기병은 왕족과 귀족들로 이루어져 사회적인 대우도 좋아 사기가 매우 높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군사적인 장점 이외에 알렉산드로스의 통치역량도 한 몫해다. 그는 다리우스 3세가 전쟁 직후 반역자 베수스에게 살해되자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뤄주고 자신을 페르시아 제국의 파괴자가 아닌 제국을 계승한 황제로 공표하며 지배층의 신임을 얻었다.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하고, 부하 장수들도 페르시아 귀족 여인들과 결혼하도록 하여 페르시아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도록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이 왕의 의무라고 믿는 왕이었다.
그는 식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맛있게 아침을 먹기 위해 야간 행군을 하고,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아침을 간소하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
(AD 46-120년경)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식성도 매우 담백한
소식가'라고 그의 식습관을 기록했다.
그런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사과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최상의 사과가 바빌로니아 일대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알고는 배를 타고 사과전쟁을 벌여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실제로 사과는 고대 메소포타미아가 산지이고 그곳 사람들은 대추야자, 무화과, 석류, 포도 등과 함께 사과를 즐겨 먹었다. 기원전 2천년대 점토 서판 기록에 '5실라의 사과케이크 1개'라는 문구가 남아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과는 '멜론'이라고 불렸다. 기원후 2세기에 쓰인 <식탁의 현인들>이라는 고대 그리스 조리서에는 "맛있는 사과는 위장에 좋고, 여름 사과는 수분이 적고, 가을 사과는 수분이 많으며, 둥근 사과는 수분이 많고 위장에 좋다"는 사과의 효능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알렉산드로스는 식사는 소박하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애주가를 넘어 술고래였다.
일단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는 측근들과 돈독한 관계를 위해
술자리는 좋은 윤활유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의 연회에도 그러한 이유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알렉산드로스는 한 번에 술 13리터를 마셨다. 그는 당시 마케도니아궁정의 주법을 따라 포도주에 물을 타지 않고 그대로 마셨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희석해서 마셨는데 이러한 주도의 차이로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을 야만인이라고 여겼다.
결국 서북부 인도의 펀자프(현, 파키스탄)까지 진군하여 서쪽 그리스부터 동쪽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고향으로 귀한을 요구하는 군사들을 위해 더 이상의 원정을 포기하고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귀한 길 위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에서 그는 열병에 걸려 32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1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동방원정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소박한 식습관에도 불구하고 그가 통치하는 동안 늘어가는 정복지에서 진상되는 진귀한 식재료로 마케도니아인의 식습관은 점점 호사스러워졌다.
그의 동방원정은 음식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식재료가 동서로 이동하고 그리스-마케도니아-페르시아의 식문화가 융합되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것에는 암탉이 있었다. 고대 유럽에서 닭은 보기 드물었고, 고급 음식이었다. 인도에는 가축화된 암탉이 있었다.
쌀도 대부분의 그리스인에게는 아직 익숙치 않은 곡물로 이때 유럽세계에 알려졌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해진 것은 포도나무다. 기원전 2세기에 그리스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즐겨 마셔온 포도주와 포도가 중국에 도달했다.
그 밖에 순무, 비트, 아스파라거스와 배 같은 그리스의 채소와 과일나무가 이식되어 품종과 재배방법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가 인더스 강 유역에 다다른
어느날 그곳에서
원주민들이 사탕수수를 끓여 만든
갈색의 가루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벌 없이도 꿀을 얻을 수 있는 이 가루를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고 전해진다.
이 갈색가루는 바로 설탕이었다.
이렇게 해서 설탕은 서방세계에 등장하게
되었다(기원전 326년).
초기 설탕은 왕이나 귀족들만 먹을 수 있는 값비싼 것이었다. 로마의 역사학자에 따르면 설탕이 약용으로 쓰였으며, 은과 같은 가치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이후 설탕은 이슬람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7~11세기). 아랍인들은 설탕을 무척 좋아해 사탕수수의 재배가 가능한 지역마다 대규모의 설탕 제조 공장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슬람에서도 설탕은 주로 약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식용으로는 특별한 행사나 축제 혹은 귀족계층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7-8세기 이후에 정제기술의 발전에 따라 백설탕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렇게 설탕을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상품이 바로 "캐러멜"이다. 캐러멜은 아랍어로 '쿠라트 알 밀', 즉 '달콤한 소금으로 만든 공'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6세기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설탕은 국제 무역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히트 상품으로 자리잡았고 유럽 각국은 설탕쟁탈전에 나섰다. 스페인은 서인도제도에,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영국은 자메이카를 점령해 사탕수수만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을 세웠다. 이 설탕 무역에서 가장 이익을 본 나라는 영국이었다.
이러한 설탕 무역에서 영국에게 밀린 프로이센(현, 독일)의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는 식용이 아닌 가축의 사료로 쓰이던 사탕무를 가열해
설탕을 추출해내는데 성공했다.
이 사탕무로 만든 설탕은 국제 설탕 시장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사탕무는 온난한 기후에서만 재배되는 사탕수수와 달리 습하고 추운 유럽에서도 잘 자랐고 병충해에도 강했다. 더욱이 생육기간 및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노예를 동원해야 하는 사탕수수 재배보다 수월했다.
그러나 사탕무의 등장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다름아닌 또 다른 세계 정복자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경제에 타격을 미치고자 "대륙봉쇄령"을 선언해 영국과 전 유럽 국가의 교역을 막았다. 이에 영국은 유럽에 설탕을 팔지 않는 것으로 보복했다. 많은 유럽인들은 그의 대륙봉쇄령에 반발했다. 그는 이러한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사탕무 재배를 장려하고 사탕무 수확에 대한 세금을 4년간 면제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몰락했지만 사탕무는 건재했다. 영국과 정상적인 교역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유럽에서는 사탕무에서 추출한 설탕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기원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은 음식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원대한 세계정복에 대한 야망의 부산물이었던 동서 식문화의 교류는 그리스의 흥망성쇠를 거쳐 로마와 인도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현대 유럽과 아시아 각지에서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출처: 맛있는 세계사, 음식경제사, 전쟁이 남긴 음식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