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산업과 경제
2025년에도 오월은 푸르다.
나이 때문인지, 격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 3시, 몰상식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유죄 취지 파기환송"이란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아야만 했다. 대법원이 지정기일에 가장 유력한 21대 대선 후보에게 내린 전원합의체 처분이다. 비슷한 시각, 1948년생 최아영씨를 부인으로 둔 1949년생 한덕수 총리 겸 대통령권한대행의 사임 소식도 나란히 확인된다.
지난 해 12월 3일 비상계엄령 선포로 시작된 일련의 사태와 현상에 대해 이탈리아 잡지 편집장이 요청한 원고는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한 상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다뤄야 할 지 알 수 없었고, 애초에 무엇인가 쓸 수 있는 힘도 없었다. 이재명 후보에 대한 오늘 대법원 선고가 다룬 재판의 핵심 쟁점은 2가지 라고 한다. 故 김문기를 모른다고 했던 그의 TV인터뷰, 그리고 시에 국토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취지의 청문회 답변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하는가 하는 것이다. 1심은 유죄, 2심은 무죄였고, 최종심은 '유죄 취지 파기 환송'이다. 원심은 1월 15일 다시 재판을 열어 대법원이 지휘한 바에 따라 특별히 공을 들인 '엄중한' 사법처리를 예고하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잠시 '법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딱 한번이었고, 스스로 무엇이나 누군가를 판단할 만한 깜냥이 아니라는 생각에 즉시 접었다. 대신 '사회'를 알아보고 싶었다. 절대 도망가지 않고 굳건히 제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예술'은 중학생 시절 일찌감치 나중을 기약해 두었다. 그러다 이제야 작금의 사태를 실컷 구경하며 어줍잖은 법 공부를 자동으로 하게 되는 셈인데, 다시 학창시절로 되돌아 간 듯 새우잡이 배에 끌려온 듯 여러달 째 일체 무동력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다.
국가 고위직이라는 자리가 선출과 임명, 채용과 인사, 고과와 상벌, 승진, 퇴직에 이르는 복잡 다단한 유기적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것을 생각하며 최근의 일들을 돌이켜 보니, '피터의 법칙 (1969, Peter & Hull)'이 슬그머니 생각난다. 지배와 피지배가 아닌 공생공영의 가치가 보편적 상식으로 여겨진 지 오래지만, 실상은 1인자와 2인자, 그리고 그 강력한 힘을 둘러 싼 구름같은 카르텔, 그리로 통하는 문, 사다리, 기회와 '운'의 의미와 요령이 진정한 능력보다 무능력함으로 정치와 행정, 사법의 피라미드를 이루고 현실과 동떨어진 유물처럼 제 기능을 하지 못해도 여전히 위엄과 특권을 지키는 갑옷 기능하는 기이한 왜곡을 보며, 호모 사피엔스의 DNA와 기저에 각인된 학습의 무의식적 발현력에 놀란다. 가면을 쓰고 단순한 박자에 맞춰 느릿느릿 진행하는 일본 전통 연극 노(noh, 能)를 구경하는 느낌이다. 피터의 법칙도, 노가쿠(能樂)도 비판적 풍자와 해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니, 새삼 참 오래된 것들이지만 어쩌다 발목을 잡힌 구경꾼도 못할 짓 만은 아니다.
1958 - 1979 : 세월은 지금 어디만큼 왔을까?
코스타리카에서 또 사진이 날아든다. Children's Eternal Rainforest로 지정된 구역이다. 아직은 길도 시설도 없는 곳이란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제 이해가 간다. 소금기 도는 파란 바다를 누비던 이들은 이제 이끼와 고사리가 미끄덩거리는 민물 빗속의 초록 숲을 지키려 애를 쓰는 것이다. (젬마도 같은 사진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폰 충전이 급해서 찾아온 것 같았지만, 우리 모두 친구였던 시절이 그립다.)
5월 2일 서초동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 - 교대역에서 고속버스터미널, 잠원, 신사, 압구정, 옥수, 금호, 약수를 거쳐 동대입구와 충무로를 지난다. 20세기 말, 90년대 초의 옛 추억들이 겹겹으로 뇌리를 스친다. 현실의 한복판을 살고도 이면의 현실을 전혀 몰랐던 파릇파릇한 시절, 며칠 전에 보게 된 영화 '친구'가 그 시절 즈음의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2001년도에 나온 그 영화에 대해서는 "니가 가라, 하와이"와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장동건의 부산 사투리 대사가 유행했다는 것 빼고는 사실 엊그제까지 그리 아는 바가 없었다. 2013년 후속작 '친구2'에도 나오는 유오성 배우의 '준석' 캐릭터 연기는 정말 강렬했다. 12.3 계엄령 이후 가끔 시청하게 되는 법제사법위원회 공개방송에 곽경택 감독의 동생(사법연수원 25기 검사 곽규택 의원)과 유오성 배우의 형(사법연수원 21기 검사 유상범 의원)이 등장하는데, 법률을 전공해 검사를 거쳐 정치를 하는 만큼 영화 속 동시대 청년들의 20대 시절 "끼리 끼리" 사이에서 벌어진 내란과 내전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괜히 궁금해진다.
마약을 끊은 '친구' '준석'이 조직에서 일을 받고, 부산을 주름잡던 두목의 아들답게 수하들에게 칼 쓰는 법을 훈련시킨다. 날이 얇으면 부러지니 적당한 두께의 칼을 쓸 것, 아무리 쎈 사람도 칼을 맞는 순간 '백~프로' 주저앉게 된다는 것, 폐를 찔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면 고함을 지를 수 없기 때문에 고수들은 '등뒤에서 폐를 찌른다' 같은 너무나 무서운 노하우를 흔들림없이 날카로운 눈빛과 내편을 배려하는 아이러니한 말투로 전달한다. 힘이 없으면 무릎 꿇고 힘이 생기면 배신하며,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서로를 '살해'할 수 있는 곳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젊다 못해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친구'들은 때때로 모든 것을 잊고 순수하게 갈등하지만, 파가 갈린 '한동수'는 피살되고, '이준석'은 건달의 가오를 위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무기징역 수감자가 되어 영화는 막을 내린다. 성적표를 들고 마구잡이로 자존심을 헤집는 교사가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질문, '느그 아부지 머하시노?'... ...
'친구2' (2013)에서 차세대 조폭으로 나오는 '성훈'(배우 김우빈 分) 역시 어머니(전편 '한동수'의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의붓아버지를 폭행하며, 출소 후 조폭이 되는 모든 이유와 과정을 같은 질문에 슬쩍 묻어 놓는다.
알고리즘의 독촉으로 알게 된 것인데, 서로의 목숨과 인생을 저당잡힌 20대 청년들의 '참혹한 K-느와르 혈투'는 그 이전 군사독재 터널을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던 시대에 이미 한차례 더 있었다고 한다. 영화 '친구'의 배경은 1993년 부산이지만, 그 보다 몇년 앞서 소위 목포의 아이들끼리 맞붙었던 장소는 '강남 한복판'인 봉은사로다. 김두한이 발탁했다는 정치깡패 이정재와 유지광이 사라진 시대, 서울을 접수한 명동파 신상사(1932~2024)의 아성에 반기를 드는 여러 지방출신 조직 중 신무교동파와의 갈등으로부터 유래한 전례없던 '칼부림'의 시작, 그리고 진짜 오야붕과 시다바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을 갓 스물을 넘긴 체대 학생들과 건달들 간 기 싸움에 벌어진 참혹한 비극은 공산국민학교 출신의 노태우(1932~2021)가 대한체육회장을 거쳐 바야흐로 1987년 629 선언 이후 첫 대통령 직선제 후보로 '보통사람들' 시대를 열고 대통령으로서 88올림픽을 개최하기 전의 일이며, 공산중학교 미술반이었던 내가 고입 체력장 검사를 위해 운동장을 돌며 저질 체력을 가까스로 조금 끌어 올리고 있던 바로 그 해 1986년에 일어났다.
3년 뒤인 1989년 20대 초반의 두 체육대학 학생 건달들의 사형 집행으로 마무리 된 1986년 8월 14일 강남 한복판의 사건은 '광복절 특사'로 들뜬 분위기가 한몫 했었고, 그 보다 서너 달 더 앞서 일어난 인천 송도의 린치 사건에서 바통을 넘겨 받은 것이라고 2004년 음지의 범죄 사건들을 취재한 시사저널 주진우 기자 등은 기록하고 있다.
21세기의 첫 25년이 무르익는 5월, '어린이 날'이다.
20세기를 알지 못하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들이 나이 이미 스물을 넘겼고, 아직 그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1950년 625 동란 전후 베이비 부머 세대도 그 보다 앞서 참혹했던 일제 식민지와 태평양 전쟁시대를 직접 겪지 않았다. 과거를 전해 듣기는 마찬가지다. 이 끝에서 저 끝을 제 눈으로 목격한 100세 가까운 사람이 주변에 몇이나 있을까?
115년 전 통감부 설치 이래 화족(華族)의 일부로 인정받았던 조선귀족들과 측근들, 부역자들의 통치와 해방, 해외에 산재해 있던 엘리트들의 귀국과 암투, 전쟁과 분단, 군사독재와 산업화, 민주화, 글로벌화라는 과정 속에 쌓은 한 세기 동안의 물질적 풍요 이면에, 보이지 않는 내 머릿속 정신적 유산은 어떤 형국을 띄고 있을까?
종묘와 창경궁을 돌아나와 이화동 거리를 스치며 율곡로를 걷는다. 율곡과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리 - 개성에 물자를 대고 선조가 문짝을 떼어 걸고 건넜다는 강이자, 러일전쟁때 부터 일본이 중간지대로 설정해 두고 싶어했던 38선 이북의 판문점이다. 판문점은 널문리를 625 이후 한자식으로 정리한 이름이라고 한다. 지난 해 넷플릭스에 오른 박찬욱 감독의 '전란'이 임진왜란 배경의 민란들을 다룬다는데, 정치적 혼란을 만들어 내는 현대 대한민국 특유의 역사적 무의식은 역시 그 즈음까지 거슬러 가봐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서사와 개연성은 빈약해도 이제 소수가 아닌 다수의 세계인들이 대충 한국사의 일부를 알게 되는 것이고, 동아시아의 끼리끼리 싸움에서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며, 누가 어부지리의 틈을 차지하고 다음을 이끌어 가는지 희미하게 나마 묻어가며 알게 되는 것이다.
내란이 시작되고 말과 글, 생각이 점점 더 상세해지고 날카로워진다. 두툼한 날을 가진 적당한 길이의 칼로 등 뒤에서 폐를 찌르면 고함을 지르지 못한다던 '이준석'의 대사가 떠오를 만큼 서로가 서로의 급소를 노리기 시작한 것 처럼 검판완전체를 의심받는 정부와 여당의 정치적 관료적 행위, 그리고 말단까지 스며들어 있는 몸부림을 매일 구경한다. 그 안에 도사린 흑막과 내막을 파헤쳐 비판하고 공개 공유하려는 야당의원들과 정치인, 거리의 시민들, 전문가들과 유튜브 기자들의 활동이 얼마나 많은 형식과 내용을 바꿀 수 있을 지 일종의 '대리전'이 계속되고 있다.
정확한 시기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2016/2017년 초, 전광훈이 원자력연구원 원로 관계자에게 손편지를 보내왔다. 보수의 단결을 위해 자신에게 힘을 실어달라는 내용이라는데. 기독자유당 창당을 위해 세를 모으던 때였나 보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편지를 쓱 넘겨주는 손을 도로 물리고 개인의 종교와 신념은 알아서 하시면 되지 않겠냐고 했을 뿐, 직접 내용을 들여다 보진 않았다. 타인의 말과 글과 생각에 큰 의심을 품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속으로 조금 거북스러웠던 것 같다. 2020년 초 전광훈과 함께 자유통일당을 창당했던 김문수는 지금 내란의 주동이 된 자칭 보수당의 차기 대선후보로 결정되었다. 선거비용 때문인지 대부업체 대표를 홍보실장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한덕수와 선거비용이 없어 19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는 김문수가 서로 단일화에 이를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하루 만에 대선 후원금을 모두 모았다는 이재명과의 차이가 압도적이다. (김문수는 공식 대선후보를 지원하지 않는 소속당의 행보에 분노를 표하고 있다.)
샹샨루오쉐이(上善若水) -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건 이미 진부한 이야기일까?
혼란을 겪을 이유도 틈도 없을 것 같았던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호의 충격 이후 알파고의 도전과 함께 Κ-innitiatives로 코로나 시대를 헤쳐나와 지금까지 오는 동안, 여전히 꿈쩍하지 않고 사람들을 짓누르는 돌덩이 같은 문제들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개개인의 인간과 비슷한 몸을 부여 받기 시작한 탈인간적 지식정보의 흐름은 누군가의 피해와 희생을 당연한 과정으로 여기며 선을 긋고 벽과 문을 만들어 영원불멸을 꿈꾸는 지배 카르텔의 주술적 신화까지 흡수하게 될 것인지 궁금하다.
한창 코인에 투자하며 날마다 불어나는 소소한 보상에 신나 하던 한 선배가 현금화 과정이 복잡하다며 실망한 듯 어려움을 호소한다. 언제나 그렇듯 '흐름'은 일방향이며 잘 순환되지 않는다. 거스르고 역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밤새 솔루션을 찾아 현금화에 성공했다고 한다. 보다 고령의 투자자들은 어떻게 투자이익을 회수하는지 모르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얼마 전 경제산업 정책 문답을 하는 이재명 대선 후보의 쇼츠를 본 적이 있다. 그는 형식적으로 가려는 행사진행을 자유로운 분위기로 이끌었다. 누군가 '멀티플라이(이익배가증식)가 어려워진 시대에... 어쩌고 저쩌고, 경제적 비전에 대한 꿈과 자신감이 필요하다'라며 길게 마이크를 잡고 질의인지 소신인지 하는 말을 끝까지 듣고, '저도 그 부분에 공감한다'는 식으로 짧게 답을 한다. 곧 이어 '저도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며 어느 전문가에게 질문한다. '싯가총액에 비해 심하게 과도한 종목 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같은 내용이었다. 빈 깡통처럼 쓰다버린 부실 종목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폐업같은 절차를 도와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끝나는 쇼츠였다.
가끔 어떤 사건들에서 놀라는 부분은 몇몇 특정 기획자와 법률, 회계 전문가들이 기업의 자금흐름에 끼어들어 정관변경, 임원인사, 상장화 과정을 추진한다며 오히려 많은 기업들을 파괴시키고 거기서 얻은 부로 쉬지 않고 계속 암약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애초 기업의 경영설계와 운영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그 잘못된 만남과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비전은 허황된 꿈이고, 절차와 진행은 연극이며, 실제 목적은 중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실물가치를 탈취하는 것이라서, 재화는 옮겨가고 피해자를 남기고 가해자는 사라지는 사기성 방식이다. 실존하는 그들의 흐름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의외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가능한 사회적 기저 심리와 제도적 장치가 의아할 뿐이다.
지난 해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를 쓴 한강에게 문학상을 주고, 해방 후 80년간 몸에 새긴 고통을 평화적 노력에 쏟아부은 원폭피해자 모임에 평화상을 준 노벨재단은 19세기의 눈부신 기술적 진보가 20세기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안타까워하며 나름의 마지막 깍듯한 예우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3년 간의 중국생활을 마치고 홍콩을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 - 잠시 머물던 애드미럴티(Αdmiralty, 金鐘)역에서 1987년부터 2006년까지 FRB의장으로 코로나 시대 이전까지의 세계 경제 흐름을 이끌었던 그린스펀(1926~)의 퇴임 후 자서전 "The Age of Turbulance (2008. 9. 9)"을 발견해 구입해 읽었다. 열흘 뒤 한국에서 발매되어 싸이월드 음원으로 제공된 SM소속 뮤지션 그룹의 신곡은 BTS를 키우는 Κ-pop 아이돌의 교과서가 된다. 똥퐝쳔-치(東方神起) 4집 앨범 2번 트랙 '주문(呪文)-Mirotic'... ...
약 일년 삼개월 뒤 시작된 전속계약 소송으로 20~22세 청년 5인 완전체였던 동방신기는 2인으로 축소되었고, 세인들은 지난 해 18년 만에 SBS 인기가요에 김재중이 출연한 것을 그간의 여러 갈등과 상황의 총제적 결론 지점으로 보는 듯 하다.
과거를 알지 못하면서 미래를 그리는 일은 쉽지 않다.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정말 한심한 일이다.
앞서가는 것도 발맞춰 가는 것도 뒤쳐져 가는 것도 결국은 하나의 흐름일 터이다. 그것을 이제,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4월 15일자 한겨레 고명섭 칼럼에 소크라테스 관점으로 보는 에로스의 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생각해 보고 싶은 내용이다.